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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Feb 04. 2021

착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착한 사람들에겐 늘 변명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 <착하다>는 어떤 의미로 쓰일까?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용례로, 우리 착한 댕댕이... 는 말 잘 듣는 개를 말한다. 이때의 댕댕이는 주인에 손짓에 빠른 반응을 보이고, 배변훈련이 잘되어있어 주인을 속 썩이지 않는 강아지여야 한다.


이런 의미의 착함에 해당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경우는 상황 자체가 규범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규범적이라는 것은 상황 자체에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지 않아야 하고, 주고받는 대가관계가 동등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도덕적이며 전형적인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착함은 마음속의 문제이지 관계의 규칙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마치 착함이 관계 속에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아이들이나 성인들 사이에서 착함이 문제 되는 상황은 누군가의 배려나 양보가 전제된다. 특히 부모가 말하는 아이들의 착함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부모의 바람대로 상황을 만들어가고 아이들을 이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들은 아이가 잘 따르고 순응하면... <우리 착한 아들과 딸>을 호명한다.


회사 내에서도 <착한 김대리나 더 착한 최과장>은 상급자나 동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는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부탁을 잘 들어주거나 양보를 해주는 경우다. 그렇게 착함은 상대방의 캐릭터나 행동의 결과라기보다는 평가자의 시선 속에서 키워지는 편면적 기준에 불과할 때가 많다.


결국 누군가 우리에게 착하다고 했을 때, 우리의 어떤 말과 행동이 그 누군가에게 이득이 되었을 때 밖에 없다. 냉정히 말해 상대에게 불이익이 되는 착함은 없는 것이다. 부모 말을 잘 들어 공부 잘하고 학원 잘 다니고 말썽 피우지 않아 부모를 편하게 해주는 아이가 부모들이 바라는 착한 아이다.(물론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는 것이 부모에게 무슨 이익이 될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돌아보면, 우리 주위에는 착한 이들이 많다. 알면서도 속아주고 양보해주고 이해해주고 선동당해주고... 그러다 보니 착한 이들이 <착한 호갱님>이 되는 경우가 일상 다반사다. 우리 또한 누군가의 성격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도 <착하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때의 착함도 "쓸데없이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할 정도로 친절하시네요. 자신의 손해를 감내할 정도로 성격 좋아 보이네요. ",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이렇듯 현실 속의 <착하다>의 동의어는 <실속이 없다>가 아닐까.


규범적 의미의 <착하다>의 반대말은 <악하다>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의 <착하다>의 반대말은 <타협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당당하다>.. 정도로 의미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상황논리나 강자들(혹은 약은 자)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쉽게 믿지 않고 선동당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어느 착한 사람의 변명>

                                         by 지성파파


어느 시인이 말했지

곡선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아하게 돌아갔다

아주 많이 늦었다   

  

어느 교수가 말했지

흔들려야 청춘이라고

그래서 수없이 흔들렸다

없는 멀미가 생겼다

    

어느 스님이 말했지

멈추면 비로소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멈추었다

앞서가는 이들의 뒷모습만 보였다    

 

다른 어느 교수가 말했지

노는 만큼 성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열심히 놀았다

계속 놀 것 같다   

  

어느 정치인이 말했지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고

그래서 일찍 들어갔다

가족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상한 정치인이 말했지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무엇을 줄 것인지 생각했다

줄게 별로 없었다


                                

윗글에 있는 유명인들의 글과 말과 행동은 나름 훌륭(?)하다. 한때 유행했던 말과 문장, 추종했던 우리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들의 말에 환호했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고 싶어 했다. 어쩌다 나쁜 의도를 가진 말에 대해서는 마음껏 비웃기도 했다. 그들이 쓴 책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줄을 긋고 탐독하기도 했다. 그들의 언행이 무슨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한번 정도는 의심을 해봤어야 되지 않을까. 저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삶 속에서 실천해보았을까. 자신이 말한 문장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는 있었을까.


현실 속에 존재하는 착한 이들은 저들 같은 유명인들의 한마디에 많이 흔들리고 잘 듣는 훈련이 되어있다. 소위 인플루언서들의 말과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과한 영향력이다. 그 파급효과는 개인들의 평가적 시선의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 놓여있을 것이다. 수용과 선택은 듣고 보고 말하는 이들의 몫이고, 그 개인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도 오로지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의 자못 진지한 표현에 숨은 함의(含意, implication)도 있겠지만, 그러한 해석은 난해한 시구를 해독하는 만큼이나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받아들이는 저마다의 관점에 의해 얼마든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그 영향력이 시간적으로는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우리 개개인은 쉽게 멘탈이 붕괴되고, 더 쉽게 감동받거나 상처 받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수없이 반복되는 그럴듯한 말과 행동에 정서적 일체감과 위로를 받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삶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타인의 삶과 외형은 모범으로 거나 흉내 낼 대상은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쉽게 받고 말을 잘 듣는... 소위 착한 사람들에겐 늘 변명이 기다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착한 사람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물론 결과가 좋을 때면 자신의 능력으로 포장하거나 자화자찬의 독무대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반면, 자기주장과 확신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처음부터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시작했으므로.


그래서 우리 너무 착하게 살지는 말자. 그렇다고 너무 자기주장만으로 살지도 말자. 세상살이에는 혼자 감당하기에 버거운 것들도 많으니까. 지나친 자기 확신도 과도한 타인 추종도 우리의 삶에 크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 간에도 이 명제는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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