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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07. 2022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올 권리가 있다

가족과 친구를 만나기 위해 외출한 누군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집으로 돌아올 권리는 천부인권이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명백하다.   

  

우리 모두는 아침에 집을 나서면 저녁에 안전하게 보금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부모와 자식들이 기다리는 집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의 기초다. 언제 어떻게 돌아올 것인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올 것인지는 개인이 결정할 문제지만, 그 결정의 전제에는 국가와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 굳이 국가와 시민 간의 계약내용을 소환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첫 번째 의무다. 이태원 참사에서 보았듯이, 엄중한 책무를 이토록 가벼이 저버린 국가는 존재 의의가 없다.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선언하고 있다. 또한, 제34조 제6항에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 규정이 허울뿐인 장식이라면 우리의 2022년 10월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국가가 자신의 본질적 의무를 망각할 때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절망과 비통함만 남는다. 지금처럼.    

 

한 세기 전에도 중국의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국가의 존재 의의를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국민에게 이익을 주고 보호하는 영원한 선()이며, 정부는 국가의 도구로서 국가의 가치에 충실한 존재 의의를 갖는다.”  

   

과연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대한민국은 어떠할까? 국가가 국민에게 이익을 주고 보호하는 영원한 선의 역할을 하고 있을까? 정부가 국가의 도구로서 국가가 추구하는 가치에 충실한 존재 의의를 갖고 있을까?  

    

지난 이태원 참사 현장에 국가는 없었다. 당연히 그 도구인 정부는 존재하지 못했다. 영원한 선이 아니라 최소한의 선한 역할마저 포기했다.   

   

위기에 빠진 국민이 그토록 간절한 구조요청을 바랐지만, 어떤 국가 기관도 답하지 않았다. 관할 지역인 용산구청장과 용산경찰서장도, 서울시장과 서울경찰청장도, 행정안전부 장관도, 대통령도 듣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이들 모두는 국가의 도구에 불과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국가기관이나 공무원 조직에서는 위계 체계상 실무자들이 정책을 만들거나 결단을 내릴 수는 없다. 보다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누군가가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여야 한다. 그러기에 큰 명예와 보수를 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자신들의 권한만 즐길 뿐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했던 10월 29일의 대한민국은 형해화되었다. 헌법과 경찰관직무집행법,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상의 각종 행위규범까지 말할 필요도 없다. 국민의 절박한 구조요청에 무슨 법적인 근거가 필요한가. 무슨 명령체계가 필요한가. 모두가 핑계고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어떤 이유든지 국민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곳에는 국가가 존재해야 한다. 혹시나 모를 위험을 예방하고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해야 할 기본적인 책임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매뉴얼은 사전에 준비되어 있어야 했고, 다수 국민의 운집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어떠한 변명도 가당치 않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서 보았던 국가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우리의 큰 불행이다. 지난 역사와 미진한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무책임한 자들을 선거의 이름으로 내보낸 것은 우리의 더 큰 불행이다.    

  

이태원 참사의 모든 책임은 국가와 정부에 있다.

최종 책임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에게 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국가와 정부는 의무를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재난방지 시스템이나 보호의무의 법적 근거 부재, 행사의 주최자 유무와 같은 말장난 같은 핑계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고 있다.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과 무책임함은 우리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아마도 가슴 아팠던 지난 참사의 뒤처리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비겁함은 말단 실무자들의 업무상 책임으로 꼬리 자르기나 희생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자신들의 안위나 자리보전에 더 큰 정성을 들이는 이들로 가득 차 있다. 오죽하면 다수의 국민들이 각자도생의 세상이라고 말하겠는가. 이는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고 설사 존재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음을 비꼬는 말이다.     

 

모처럼 축제를 즐기러 간 우리의 젊은 청춘들과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곳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도 아니었고, 국제적인 테러리스트가 활개를 치는 무법지대도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오지 못한 곳은 우리가 일상과 주말을 즐기는 평범한 길거리였다. 우리의 길거리가 그토록 위험한 장소라는 것을 처음 알게 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예방하고 정부를 통해 조치하였다면... 모두가 집으로 돌아왔을 10월 말의 토요일이었다. 그러지 못했기에 많은 부모들과 친구들 가슴에 못이 박히던 그런 주말 밤이었다. 그 순간 책임져야 할 누군가는 잠에 취해 있었고, 또 다른 책임을 져야 할 누군가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책임 있는 누군가가 인파의 동선을 설계(일방통행)하고, 공적인 수단을 활용하여 위험요소를 사전에 차단하며, 적절한 거리를 두고 경찰력을 통해 군중을 이성적으로 통제하였다면.... 우리는 10. 29일 토요일을 행복한 주말 밤으로 추억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비통함이 애끓던 이태원 길거리에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렸음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마음속 깊이 애도합니다.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고 치유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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