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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Nov 19. 2022

일제고사 부활 노력이 "웃기고 있네"로 보이는 이유

"아! 시험 보기 싫다."

아니 이 무슨 힘 빠지는 소린가! 무슨 고시생도 아니고, 고3도 아닌 초등 5학년생 막내의 한숨 소리였다. 요즘 수업시간에 쪽지시험이나 수시평가가 반복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수많은 시험을 거치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거쳐온 아빠는 그 이유를 아들에게 물었다. 초5가 말하기를, "시험을 위한 공부는 재미도 없고 억지로 하는 공부 같아서 싫다는 거다." 어린 현자의 날카로우면서 핑계 어린 현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번 정부는 어느 날 갑자기 학업성취도 평가를 위한 일제고사 부활을 선언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연구용역의 결과나 무슨 대학 나잘난 교수의 연구 논문도 하나 없이 그냥 내뱉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기초학력 보장'이라는 한 가지로 추정된다. 대충 들으면 마치 대단한 인과관계라도 있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아이들의 기초학력과 일제고사 간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일제고사는 단지 시험의 일종이고 기초학력 저하는 현 교육시스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학업성취도 평가는 현행 제도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문제다.


예전에 누군가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시험을 책으로 펴낸걸 슬쩍 본 적이 있다. 그것도 서점에 서서... 책을 보면서 놀란 것은 시험에서 얻은 성적이나 성과가 아니었다. 무려 16년 이상을 저자가 모아놓은 방대한 시험 정보였다. 물론 책 속에는 저자의 시험 자체에 대한 호불호나 평가는 없었다. 그 노력과 정성이 대단했다. 우리가 이토록 많은 시험을 지나왔던가!

 

시험 자체를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현실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존재할 터이지만, 이런 유형의 캐릭터들이 인류 문명사나 세상사에 기여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다. 그러한 선호가 1등이나 우승이라는 개인적 만족에 그치지 않았을까. 물론 어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시험을 수단적 도구로 좋아할 수는 있겠다. 예전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했던 어느 서울대생의 책도 있지만, 그것은 세상살이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라 여기서 길게 말할 필요까지없겠다.


당연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유희적 인간이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놀이를 좋아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도 시험과목으로 하게 되면 게임 시장이 사멸할 것이라는 농담도 있지 않은가. 그 정도로 시험목적 이외의 공부와 시험을 위한 공부는 차이가 크다. 더더욱 삶을 위한 공부와 성적을 위한 공부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험을 위한 공부에만 매달리고 평가받고 있지 않은가. 시험이 끝나면 몽땅 잊어버리고 마는 지식들.


경쟁의 순기능이 반드시 빈번한 시험과 평가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 나오는 자체가 경쟁이었던 우리가 경쟁을 피해서 살아갈 수는 없다. 경쟁 자체보다는 다른 가치와 목적이 실종된 학교환경과 교육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험과 성적을 통한 줄 세우기 외에는 아이들에 대한 평가를 해본 적이 없는 제도가 문제라는 거다. 저마다의 소질과 적성을 몇 가지 과목으로 우열을 가리고 그들에게 '엘리트'라는 월계관을 씌어준다고 우리 사회의 보편적 지성 수준이 올라가지는 못한다. 그 선택받은 소수가 근거 없는 선민의식을 가질 때의 폐해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현재의 우리 사회는 경쟁의 역기능이 가진 최대한의 폐해를 접하고 있다.

 


어떤 분야와 업무에 적합한 인물을 탐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수많은 방법 중 하나가 교과목이나 시험성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거다. 존재하는 다양한 다른 평가방식을 도입하면 이들의 순위는 언제든지 바뀔 가능성이 크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 단편적인 시험성적을 마치 "태양의 신전"처럼 떠받들어 살아오다 보니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한 인사들의 출현을 보고 있다. 특정 대학의 특정 학과 출신, 특정 시험 출신들이 만들어내는 디스토피아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지금의 우리처럼, 한두 가지 시험을 통해 불가침의 권한을 평생 부여받는 사회 시스템이 어디 있을까? 고인물은 반드시 썩는다.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분야에 약간의 전문성만으로 압도적 권한을 부여해주는 제도는 한계가 분명하다. 그러한 제도를 신봉하는 사회 또한 한계의 임계점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어찌 되었건 협소한 전문성이 인간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보편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초등학교 5학년도 이해하는 줄 세우기 시험의 폐해를... 정책담당자들은 진정 모르는 것일까? 어린 영혼들에게 생채기를 낼 수밖에 없고, 친구를 성적과 등수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제도를 왜 되살리려 하는지 의문이 든다.


왜 학생들을 성적으로 줄을 세우려 하는가?
왜 다시 아이들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려는가?
왜 아이들의 다양한 성향과 자존감에 대해서 알려하지 않는가?
왜 교육부장관 한 사람이 바뀌면 교육제도가 대변혁을 일으켜야 하는가?
(문외한인) 대통령의 어설픈 말 한마디에 교육정책이 바뀌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본인들도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그냥 내뱉어버린 철학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박약한 소신에 의하면, 취소하거나 하지 않았던 말로 치부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이들을 그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으로 만들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이 같은 알 수 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이미 폐지된 일제고사를 부활해서 아이들을 괴롭힌다는 뉴스는 아직은 없다. 왜일까? 아마도 일선 학교에서도 지나가는 개도 웃을 정도로 "웃기고 있네"로 들리지 않았을까. 그나마 일선 교육현장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존재해서 다행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성적을 앞세우는 경쟁 위주의 교육환경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한 학생이 교과 등수로만 평가되면 시험과 성적만 남고 아이들은 사라지는다는 것을. 줄 세우기 위한 시험은 시험을 위한 재능만 남기고 나머지 재능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대한민국에는 시험의 달인(?)들이 너무 많다. 그 달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우리 현실을 보면 진정 웃기지 않는가! 만약 일제고사를 부활하고 싶다면, 그 시험의 달인들에게 이런 과목을 권하고 싶다. 진심으로...


올바른 역사관이란 무엇인가?
바람직한 시민의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대한민국의 존재 의의와 올바른 공직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애민정신을 진정으로 구현할 수 있는 국가정책은?
공직자로서 권한과 책임의 바람직한 상관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역시나,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달인들이 이런 과목을 시험 본다면.... 거의 모두 낙제점수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이런 과목들은 책으로 익히고 외워서 시험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들의 학교와 내신성적과 시험 점수만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미 그들의 하찮고 우스운 민낯을 계속 반복적으로 보고 있다. 아들의 마음을 빌어 진정으로 "웃기고 있네" 그 말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


아빠는 다시 아들에게 물었다.

 "혹시 시험 보기가 싫은 거는 아니고?"

막내는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아빠에게 말했다.

"지금은 친구들과 재밌게 놀고 공부하고 게임하고, 시험은 어쩌다 가끔 보고.... 그게 초등학생들이 바라는 걱정 없는 학교생활 같은데!"(그래도 아들의 입에서 '시험공부만 해서 부끄럼도 모르는 어른이 되면 어떡해! '라는 말을 안 들어서 다행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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