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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성파파 Sep 23. 2024

9. 우리의 정치성향을 심어주세요!(1)

  “대표님, 별난 부부 이야기 아세요?”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고민정 팀장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선정릉 안쪽 큰 소나무의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오래되고 아늑한 풍경이었다. 느리게 걷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여유로운 오후 6시.


  안단태 대표는 머리가 무겁던 차에 반갑게 다가오는 고민정에게 속내를 숨기며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무슨 얘긴데요? 밑도 끝도 없이... 별난 부부 이야기는?”


  “그게요. 실제 친구의 친구 얘긴데요. 글쎄 저쪽 지방 여자와 이쪽 지방 남자가 어찌어찌 결혼을 해서 살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 밥상을 어떻게 차리는지 아세요?”


  “글쎄요, 오늘 저녁 내 밥상도 못 챙겨 먹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가족 밥상을... 허허허”


  “이 두 사람은 서로 식성이나 취향이 너무 안 맞아서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데요. 함께 하되 따로 먹기로....”


  “오! 철학적인데요. 함게 하되 따로 먹는다는 얘기는....”


  웃기는 얘기를 할 때 먼저 웃어버리는 사람이 하는 얘기는 재미없다는 게 정설이다. 고팀장이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혼자 생각하다가 웃기는 얘기는 먼저 웃고 나중에 말하다 보니 듣는 이들은 이미 김 빠진 사이다를 마시는 격이 될 수밖에.


  “그니까 들어보세요. 두 사람이 지방색이나 정치색이 전혀 다른 출신이라서... 반찬은 자기 엄마가 해주는 반찬만 먹는 다네요. 그러다 보니 한 식탁 위에 두 지역의 두 엄마께서 해주신 두벌의 반찬이 나와 있는 거예요. 그 식탁 풍경, 웃기기 않으세요?”


  웃고 싶어도 상대가 먼저 웃어버린 까닭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안대표.


  “진짜로 웃고 싶었는데, 막상 웃으려고 생각하니까. 씁쓸한 웃음이 나오네요. 그 식탁 얘기가 진실이라면 웃픈 현실이네요. 좁다란 나라에서 지역 나누고 지방색 나누고 정치성향 나누고... 이제는 밥상도 반찬도 나누고.. 더 나눌 게 있나요. 침대까지 나누면 그게 부부라는 공식의 성립이...”


  여기까지 말하다 안대표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두 사람 모두 처녀총각이라 침대 얘기를 한다는 게 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머쓱하게 고팀장을 쳐다보니 빌딩 저편에서 살짝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 역광에 비친 긴 생머리의 여성을 보고서는 안대표는 깜짝 놀랐다. 바로 일 미터 앞에 있는 이 여성. 은근히 분위기 있어 보이는 여자가 기 세고 농담 잘하는 고민정이란 말인가! 안대표가 하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자, 민정은 안대표가 어디 아픈지 살펴본다며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안 좋은데 있으세요? 표정이 발그레한 게 아직 갱년기는 한참 멀었고, 혹시 몸에 열나는 거는 아니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고팀장의 말에 현실세계로 돌아온 안대표. 못 볼걸 본 거 같은 표정으로 쓴 입맛을 다셨다. 고팀장은 이런 반응이 재밌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며 웃었다. 안대표의 얼굴은 무슨 까닭인지 저녁놀을 닮은 홍당무처럼 변해갔다. 지하철역 입구가 보이자 고팀장이 안대표의 크로스 백을 툭툭 치며 말했다.


  “대표님, 그렇게 이유 없이 몸에 열나고 얼굴이 상기될 때는 시원한 생맥주가 특효약이래요. 치맥 어떠신가요? 혹시 약속이 없으시다면...”


  이미 약속이 없다는 걸 안다는 듯이 물었다. 원래 정상적인 질문은 약속 유무를 먼저 묻고 저녁메뉴와 주종은 그다음이었지만, 고민정 특유의 관심법은 이럴 때 빛을 발했다. 그러잖아도 기자인 친구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돼서 저녁을 어떻게 먹나 고민하던 차였다. 안대표는 혼자 살면서도 혼밥을 싫어했다. 혼밥 탈출기회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그 재미있다는 부부 얘기도 더 듣고 싶었다. 그렇다고 마냥 이렇게 고팀장의 페이스대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소심한 반항 하나를 생각해 냈다.


  “혹시 더 재밌는 얘깃거리가 있나요? 단, 혼자 먼저 웃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그럼요. 그 부부 얘기만 있겠어요. 더 재밌는 얘기들이 줄을 서서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줄 텐데요. 치킨하고 감자튀김도 함께요... 호호호.”


  “정 그러시다면... 저쪽 테라스가 있는 치킨 집으로 가시죠. 이 시간에 가면 웨이팅 할 필요도 없고. 멀리 빌딩숲 사이로 노을구경도 하고.”


  고팀장은 따라올 줄 알았다면서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무슨 남자가 먼저 저녁약속이 있냐고 물어나 보던지. 지하철로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 어디 약속이 있는 모양이냐고. 웃자고 한 얘기를 저리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센스는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눈치코치도 없이 그저 AI연구나 사업에만 정신 팔리는 남자란..... 참, 그러니까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저 나이 먹도록 혼자 지지리 궁상떨고 살고 있는 거지. 그러면서도 한발 앞장서서 걷고 있는 안대표의 옆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얼굴 뒤로 한층 붉어진 구름 하나가 풍경이 되었다.



  이면도로에 있는 공원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테라스 치킨집. 흥겨운 음악소리에 벌써 여러 팀이 맥주잔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도가 낮아진 햇빛이 고즈넉이 비추는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라거 생맥주와 양념프라이 반반에 모둠 감자튀김을 시켰다. 뭐든 잘 먹는 고팀장이 본인의 식성대로 시킨 것이다. 하얀 거품이 넘치는 생맥주잔을 쨍 소리가 나도록 건배했다.


  “캬하!! 역시 빈속에 안주 나오기 전에 한 모금 마시는 생맥주는 기가 막힌 맛인데요. 그렇지 않아요? 안대표님.”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끝으로 닦아내며 만족한 표정인 고팀장. 두 손으로 엄지까지 척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돌아가는 혀끝을 무심하게 쳐다보는 안대표.


  “허허허. 한 모금 치고는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닌가요! 반잔이 벌써 비었는데... 오늘 이렇게 갈증 나는 날이었나요? 조금 덥기는 했지만.”


  “저는요, 학교 다닐 때 처음 생맥주 첫 잔을 마시고는 꿀물을 마시는 줄 알았어요. 특히 안주 먹기 전에 식도로 짜르르 내려가는 차가운 느낌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 하하하. 아주 맛있는 느낌이죵.”


  “아! 그 정도인가요? 사실 저도 그 느낌 때문에 맥주 마시거든요. 라거든 밀맥주이든 에일 맥주이든 간에 그 첫 느낌이 쫘르르... 그날의 술맛을 결정하니까. 마치 사람을 처음 만나는 것과도 같죠.”


  “오라!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 히히히. 한참 전에 티브이에서 가수 김창완 씨가 술집에서 맥주 마시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 첫 잔을 시원스레 원샷하는 거예요. 너무나 맛있게요. 그러면서 사람들 얘기를 하시는데.... 맥주라는 술은 사람이 있어야 더 맛있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죠. 저도 다른 와인이나 소주 같은 술은 혼자서도 괜찮지만 생맥주는 여럿이 어울려서 시끌벅적하게 마셔야 제 맛이 나잖아요. 이야기도 술술 나오기도 하고요...”


  다시 두 사람이 잔을 들어 남아있는 맥주를 원샷했다. 시원스레 넘어가는 맥주 맛에 도취된 두 사람. 저 멀리 노을이 서서히 저녁 빛으로 바뀌고 있다. 테라스 위의 붉은색 전등이 환해지자 앞 좌석의 말간 얼굴이 보였다. 이게 개와 늑대의 시간이던가! 차분하게 가라앉는 조명과 희미한 여명에 비친 실루엣. 두 잔 째 비워지고 있는 맥주잔에 거품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어색한 순간이 찾아왔다. 역시나 재기 발랄한 고팀장의 빈틈없는 한마디.


  “대표님 이 집 치킨 맛있죠. 저는요 날개가 제일 맛나요. 야들야들하고 발라먹는 재미도 있고, 퍽퍽 살은 영 별로예요. 근육 키워서 어디 자랑할 일도 없고.... 계속 같은 맥주 드실래요?”


  안대표는 긍정의 표시로 빈 맥주잔을 들었다. 동작 빠른 고팀장이 벨을 누르고 빈 잔을 들어 검지와 중지로 브이 자를 가리켰다. 같은 맥주로 새롭게 두 잔. 고팀장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자 부담스러운 안대표는 건배하자며 맥주잔을 그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 오후에 기획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어느 정당에서 내일 오후에 방문의사를 전해온 것 같은데요. 아마 현 정부 측 여당인 대한당 같기는 한데 정당 관계자가 우리 회사에 무슨 용건이 있을까 궁금해지는데요... 우리 대표님을 국회의원으로 영입하려고 그러나! 어, 그러면 안 되는데.... 호호호.”


  국회의원 얘기가 나오자 하마터면 맥주를 뿜을 뻔했다. 완전히 생뚱맞은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정치하는 분들이 우리 회사에 무슨 볼일이 있을까요? 우리 회사가 도움을 줄 일이 없을 듯한데.... 참고로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하하하. 농담이었어요. 혹시 우리 회사에 뭔가 유리하게 법률을 개정해 주려고 그럴까요? 지금 하는 수준들 봐서는... 가능성이 100% 없는 얘기지만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첨단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아마 우리 회사 같은 곳에 도움이 될 만한 입법을 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현직 카이스트 교수들이나 첨단기술 업체 대표들이 나서서 설명하지 않는 한 용어도 모를 텐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국회 내부에 다양한 전문성을 갖춘 의원들은 거의 없고, 맨날 변호사나 판검사 출신들만 가득가득하잖아요. 이삼십 년을 법률 관련 업무에만 종사한 이들이 전혀 다른 분야에 이해가 떨어지는 것은 당연해 보여요. 그렇다고 그들이 여타 선진국의 의원들처럼 불철주야 공부해서 의정활동을 하지는 않거든요. 우리가 수없이 봐왔지만요... 하하. 우리의 죄 없는 업보인가요?”


  안대표는 가만히 고팀장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도 고팀장님은 변호사이면서도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쪽에 해박하잖아요. 다른 분야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많이 하시고... 시도 쓰시고요. 오히려 우리 고팀장님이 국회로 가야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하하... 그러면, 큰일인데 우리 회사에는 큰 타격인데요!”


  “하하하 그럴 일 없답니다. 저는 이 일이 좋아요. 사람들도 좋고요. 특히요...”


  ‘특히요’라는 단어가 여운을 남길 무렵 고팀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미국의 유명한 팝가수가 부르는 컬러링이었다.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 멈추고는 핸드폰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뒷모습을 바라보니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찰랑거리고 있었다. 고팀장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며 안대표는 맥주잔을 들었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한 팀이 맥주집으로 우르르 들어서고 있었다.



  고팀장이 통화를 끝내고 화장실에 간 사이. 안대표는 핸드폰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여당의 전당대회에 대한 기사가 속보로 떴다. 이런 것도 굳이 속보가 될 수 있나! 현재 여당이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야당과 대화단절은 가장 큰 문제였다. 대표들 간의 회동도 없고, 야당이 민생법안을 제출해도 표결하는 본회의장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정작 속 터지는 것은 국민들이었다.


  안대표는 동생 니채에게 급히 카톡을 보냈다. 아마도 바빠서 쉽게 답장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을 하고서는.


  ‘요새 여당에서 무슨 긴박한 이슈가 있나?’

  ‘대통령실 하고 여당하고 밀접하게 보이던데, 다른 문제는 없는 건가?’


  화장실에 다녀온 고팀장은 정색을 하고 앉았다. 짜증 나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안대표는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본 듯 말했다. 고팀장의 이런 뾰로통한 표정을 처음 본 까닭이다.


  “아니, 무슨 통화이기에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요?”


  “그렇게 보이세요? 헤헤헤... 아니 집에서 엄마가 전화 왔는데.... 자꾸 재촉을 해서.... 제가 짜증을 좀 냈죠. 엄마한테요...”


  “아니, 엄마가 무슨 재촉을 했다는 건가요?”


  고팀장은 한 손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것도 아주 조그맣게....


  “결혼요...”


  어릴 적부터 긴 생머리에 로망이 있었던 안대표는 검고 긴 머리카락이 회전해서 한데 모아지고 넘어가며 펼쳐지는 궤적을 쫓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것도 해질 무렵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베이지색에 가까운 흰 블라우스 너머로 출렁이는 머리카락의 군무를 섬세하게 관찰했다. 물리적으로는 1초 정도에 불과했겠지만, 안대표의 시선 속에서는 천천히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시간이었다.


  하도 작게 말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아니 다른 관찰 대상에 집중하다 보니 청각능력에 약간의 장애가 발생했다. 때마침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인 스틸하트의 She`s Gone이 클라이맥스로 고조된 때이기도 했다.... oh lady she`s gone.... lady lady....


  “뭐라고 하셨죠? 무슨 재촉을 하신다고요...”


  취기가 오른 건지 다시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건지 고팀장의 얼굴이 볼 빨간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고팀장은 다시 그 단어를 말해야 될까를 고민했다. 시끄러운 그녀도 떠나고, 음악소리가 잦아지자 다시 그 단어를 말할 기회가 생겼다.


  “겨... 결혼이요...”


  갑자기 더듬듯 한마디 하던 차에 테이블 위 안대표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으르렁거렸다. 안대표는 ‘결혼’이라는 단어를 말없이 삼키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동생 니채로부터 답장이었다.


  ‘형, 아마 여당 대표가 바뀔 것 같은 분위긴데... 대통령 측근 문고리 3인방으로 철저히 친정체제로 한다는 소문이 들리네.’

  ‘당정분리가 원칙인데... 여기저기 많이 불안한 모양새네. 특정 라인 출신들을 자꾸 국가부처로 낙하산 태워서 뿌리는 것 보면.’

  ‘근데, 형은 어디야?’


  안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소식이 빠른 동생한테 물어봤는데... 여당 내부가 문제가 많은가 보네요. 아마도 내일 방문한다는 여당 관계자도 그거랑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당이 분열되고 지지율이 하락하다 보니 당원들을 결집시키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요?”


  평소 정치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팀장은 안대표의 얘기를 듣고서는 최근의 정치상황을 떠올렸다. 여소야대. 보수와 진보로 나뉜 한국정치의 현실. 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정당정치의 불협화음. 이 때문에 곧바로 처리해야 할 민생현안은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수십 년의 민주화 과정을 거치고도 아직까지 한국정치의 병적인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비판세력이 되어야 할 언론이 중심을 잃고 특정 정치세력의 호위무사가 된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었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어둠 속으로의 퇴행은 모든 세대에 걸쳐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먹은 고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국회가 전형적인 여소야대 상황이잖아요. 정부가 입법이나 정책을 시행하려 해도 야당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게 많죠. 하지만 어쩌면 견제와 균형이라는 측면에서는 더 바람직한 상황일지 몰라요. 제 생각에는요... 다들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저도 법조인이지만 검찰이나 특정 조직 출신들이 정치나 정부 쪽으로 과도하게 몰리는 것은 경계해야 되는데. 지금 정부는 너무 대놓고 하고 있으니까. 국민을 무시하는 게 눈에 확 드러나잖아요. 어쩌면 선거제도와 다수결 제도의 모순이 이번 정부에 두드러지는 것 같아 걱정이네요. 수사만 20여 년 했던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전문성을 갖추기라는 건 극히 어렵죠. 무엇이든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그들 분야에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인데. 그놈의 선민의식이 가장 큰 문제죠. 겸손도 교양도 배우지 못하고 수사하듯이 정치를 하려 하니 자기편 빼놓고는 나머지는 거의 예비 범죄자 취급을 안 할 수가 없죠....”


  현 정치상황과 여야구도에 대해 야무지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고팀장을 보고는 안대표는 깜짝 놀랐다. 정치적 성향을 바로 드러내는 직설적인 화법이나 자신의 정치코드를 숨기지 않는 솔직함은 요새 젊은 세대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자신의 가족은 워낙에 좌충우돌 정치얘기를 하다 보니 익숙하지만, 고팀장의 정치의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좌우 좌석을 둘러보며 누가 얘기를 듣고 있나 살폈다. 워낙에 정치현안에 민감한 시대다 보니 주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굉장한데요. 요즘 정치를 똑 바르게 바라보는 30대라... 재밌는데요. 허허허.”


  “아니, 뭐가 재밌다고요. 역시나 30대인 대표님은 지금 정치판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솔직히요.”


  “아, 그게... 솔직히 말해도 돼요. 우리 가족끼리는 많이 얘기하는데...”


  “우리끼린데 어때요. 정치이야기는 하는 거는 사실 음식 선호를 밝히는 거랑 비슷하잖아요. 어쩔 수 없이 그걸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음식 때문에 싸우지는 않지만, 정치얘기는 잘해야 본전이어서. 잘못하면 살인사건도 나기도 하고.... 여하튼 조심스럽긴 하죠. 그래서 대표님 정치적 성향은요?”


  “일단 맥주 한잔 더 할까요? 여기도 흑맥주 있는데 그걸로 마실까요? 기네스나 코젤로...”


  “네, 저는 둘 다 좋지만. 정치를 듣기 위해서는 영국의 기네스로 먼저 가볼까요?”


  고민정은 손을 번쩍 들어 ‘여기 기네스 두 잔이요.’를 크게 외쳤다. 안대표는 발랄한 고팀장의 손짓발짓 행동을 보고서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기네스는 거품이 가라앉는 특이한 맥주다. 다른 맥주는 거품이 위로만 떠오르지만, 기네스는 거품이 아래로 정리되면서 색상이 짙은 브라운에서 흑색으로 변한다. 찐하고 크리미 한 거품 때문에 선호하는 애주가들이 많다. 2대 8로 경계선이 분명해진 잔을 들며 고팀장이 말했다.


  “자, 건배하실까요? 요놈의 나라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하여!!! 우리 생각나무의 겁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기네스의 깊은 부드러움에 취해있던 고팀장은 큰 두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 가득 거품이 묻어있었다. 한편으로는 사적인 대화중에서도 사업에 관련된 이슈를 놓치지 않고 있는 안대표의 사업가적인 기질을 보고 놀랐다.


  ‘그러네. 역시 아무나 사업을 구상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회사를 만들어 키우는 것이 아니네!’


  두 사람은 정치성향뿐만 아니라 술 취향도 맞는 듯 연달아 주종을 바꿔가며 저녁시간을 즐겼다. 안대표의 머릿속에는 계속 ‘결혼’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다. 저녁시간은 밤의 얼큰한 흥취에 쫓겨 차츰 밀려나고 있었다. 나무 위의 집을 찾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날 오후 두 시. 대한당 관계자 세 사람이 생각나무를 찾아왔다. 정당 사무처 직원과 국회의원이자 대한당 정책위원회 의장이었다. 의원은 대한당의 핵심 정책통으로 잘 알려진 노덕술 의원이었다. TV에도 곧잘 나오는 유명 인사였다. 기획팀장과 고팀장이 회의실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잘 꾸며진 카페 같은 회의실을 보고는 부러움을 표했다. 커피 향과 초콜릿의 단 내음이 섞여있는 쾌적한 공간이었다. 테이블에는 구내카페에서 가져온 커피와 과자, 초콜릿이 놓여있었다. 방문자들은 자신들의 의도가 담긴 제안서를 내밀었다.  


  정당정치의 이미지 제고와 당원의 결속력 강화를 위한 방안... 이 대한당에서 가져온 제안서의 명칭이었다. 제목만 보고는 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곧바로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이들에 의하면 당원의 결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생각나무의 힘을 빌기로 했다고 한다.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의원이 생각나무 쪽을 바라보고 중저음의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아, 네 저는 대한당의 정책을 담당하는 정책위 의장 노덕술 의원입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저희 당에서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당 대표님과 대통령께서도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당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남북문제 악화와 글로벌 경제의 장기침체로 인해 더더욱 정치쇄신과 내부결속의 필요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신 대한민국의 비전이라는 주제로 우리나라의 대외적 품격과 국민들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묘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당원들의 교육을 위한 지침을 마련해서 당원들에게 배포하고자 합니다. 귀 생각나무에서 만드시는 생각의 씨앗에 우리 정당의 아이덴티티와 정당정신을 주입시켜 당원들의 교육용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 방문 목적입니다.”   

 

  고팀장은 기름기 가득한 말을 내뱉는 5선 의원이 못마땅했지만 바로 반응하지는 않았다. 저런 정치권의 인사들은 쉽고 가벼운 얘기도 어렵고 무겁게 얘기하는 게 특기이자 취미이고 재능이었다. 대화 도중 기획팀장을 바라보니 그쪽도 점차 소태 씹은 얼굴 표정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다 보니 이런 캐릭터가 흔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눈치 빠른 고팀장이 대단한 정책위 의장이 2절을 부르기 전에 얼른 말을 끊었다.


  “아, 네 노의원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언변이 워낙에 좋으셔서 조금만 얘기해도 이해가 팍팍됩니다. 결론적으로 대한당의 정당원들을 위한 교육용 도구를 위해 저희 생각나무를 방문하셨단 말씀이시죠.”


  “역시 똑똑한 분들이 계신 회사라 이해가 빠르시네요. 허허허”


  자신을 칭찬한다고 생각하는지 노의원은 허리를 뒤고 젖히며 크게 웃었다. 생각나무 팀들은 눈치 빠르게 박수까지 보내줬다. 짝짝짝. 위원은 흡족한 얼굴로 탁자 위에 놓인 초콜릿 하나를 덥석 깨물고 먹기 시작했다. 커피까지 한 모금하더니 환한 얼굴로 맛있다는 표현을 했다.


  “초콜릿 하고 커피 궁합이 아주 좋은데요. 향도 좋고 맛납니다. 이 초콜릿은 어디서?”


  “아 저희 구내 초콜릿은 카카오 85% 정도 되는 것으로 전문가가 직접 만든 수제품입니다. 맘에 드셨는가 보네요. 하하하.”


  이번에는 노의원의 밝은 얼굴을 보고는 기획팀장이 한마디를 보탰다.


  “의원님, 저희 생각나무의 콘텐츠에 대해서는 정치권에까지 홍보를 하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네요.”


  “아! 그거야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 여의도가 아닙니까? 국회에서 모르는 기업체가 있을 리가 없지요. 특히나 생각나무처럼 AI를 활용해서 생각을 만들어준다는 업체는 전후후무 하잖아요. 이런 세계적인 명성의 기업을 우리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귀를 닫고 있어도 듣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허허허.”


  역시나 노련한 의원의 한마디였다. 고팀장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프로젝트상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의원님, 그러시면요. 혹시 계약이 성사된다면 생각의 씨앗에 담길 콘텐츠는 저희가 고민해야 합니까? 아니면 정당 쪽에서 제시하실 겁니까?”


  노의원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앉아있던 직원 1이 말했다. 신중하고 정확한 말투였다.


  “네, 그것은 저희 대한당 의정연구원에서 기획 개발 검토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저희가 생각나무 쪽에 드리는 내용을 심어주시면 됩니다.”  


  직원 1 옆의 2가 더 자세한 사항을 덧붙였다. 정치학이나 정책학 관련 박사급 연구원처럼 보였다.


  “저희 당 연구원에서는 당 개혁에 관한 중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이번 대한당의 미래 프로젝트 사업 건은 그 하위 프로그램입니다. 생각나무에 의뢰할 내용에 관해서는 저희 정책개발팀에서 이미 스탠바이가 끝난 상태입니다. 여러분께서 저희 제안을 수락해 주신다면 다시 일정을 잡고 개발단계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기획팀장과 고팀장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가 다음 답변을 할지 눈치였다. 대부분의 사업성이 있는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회사가 추구하는 정신을 위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 여당에서 들고 온 제안은 더욱 그랬다. 현재의 여소야대 상황과 지지율 하락을 벗어나기 위한 궁여지책을 마련하기 위한 제안일 가능성이 컸다. 기획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팀장이 입을 뗐다.


  “네, 일단 저희 측에서 대한당의 제안서를 충분히 검토한 후에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은 어느 정도 필요하십니까? 한 일주일 정도면 내부 의견수렴을 거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잠자코 있던 노의원이 직원 1과 2와 눈빛을 교환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좋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일주일 정도면 저희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저희 당 대표님과 대통령께서도 아주 만족 해하실 겁니다.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치하는 이들 특유의 공치사를 대량 방출하는 노의원. 험난한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5선 의원의 태가 났다. 아마도 그 사탕발림 같은 한마디에 수많은 이들이 유혹을 느낄 것이다. 대통령과 정치권력이 가진 힘의 유용성에 대해서. 그들이 나눠 가질 이익에 대해서. 그런 까닭에 정치인들의 공짜 점심과 저녁이 보장되는 것이다. 노위원은 자신의 호언장담에 생각나무가 혹하고 넘어올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껄껄껄. 자신감 있는 웃음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다시 한번 생각나무 팀에서 물개박수를 보냈다. 한 푼의 영혼도 담기지 않는. 기획팀장이 정리하는 차원에서 말했다.


  “네 그러시면 오늘 주신 제안서를 저희 대표님께도 말씀드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친히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연락은 대한당 사무처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당 관계자들과 생각나무 팀은 서로 악수를 나누며 후일을 기약했다. 대한당 당직자들은 현관에서 대기 중인 자신들의 공무용 차에 탑승했다. 손님에 대한 예우상 기획팀장과 고팀장이 그들을 배웅했다. 환한 미소로 손짓까지 하면서.


  “대단한데요. 집권여당이라 그런지 공무용 차량도 제너시스 최고급 기종인데요. 저 정도면 거의 1억 정도 하지 않나요?”


  “그렇죠. 풀 옵션에 운전기사까지. 저 비용이 만약 우리 세금이라면.... 정치할 만하죠? 여의도에 고급 일식집과 한정식집이 많은 게 다 이유가 있다죠!”



커버사진 출처 :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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