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씨... 내가 작성한 거를 자기가 했다고 하니까 겁나 빡치는거지. 너도 저번에 그랬잖아. 3주 내내 야근하고 제안서를 만들어놓으니까 팀장님이 몇 자 수정해 놓고 자기가 검토한 걸로 했다고.”
“그러게. 정부장님은 왜 그럴까. 말로는 열심히 하면 보상을 받으니까 승진 평정하고 성과급도 잘 챙겨주실 것처럼 얘기하더니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나도 우리 팀장님이 자기가 프레젠테이션 할 거를 내가 다 만들고 수정하고 했잖아. 그러면 밥이라도 사면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대리가 된 민철과 정태는 커피를 마시며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입사동기인 두 사람은 틈틈이 옥상 회합을 통해 서로 불평불만을 토로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업한 지도 벌써 5년 차. 둘이 모이면 좋은 일보다 짜증 나고 억울한 일만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연봉도 눈에 띄게 상승곡선의 그래프를 닮아가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들의 자존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낙하하는 전형적인 우하향 곡선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저쪽 구석에서도 무슨 고민인지 담배연기가 소리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입사원 티를 벗어나지 못한 누군가가 선배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가슴을 태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소곤소곤 거리는 대화가 하늘 위의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건너편 빌딩의 옥상 위에도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언제부터인지 유행처럼 옥상정원이 생겨났다. 멋진 휴식 공간으로 꾸민 곳도 많았다. 꽃과 나무와 잔디 조경은 물론 다양한 휴게시설로 빌딩의 명소가 되었다. 위에서 바라보면 8차선 도로에 개미 같은 차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다.
오후 4시에는 식곤증이 아닌 하루의 피로가 천천히 밀려오는 때라 찐하고 달콤한 커피가 특히 땅겼다. 커피 잔을 들고 혼자서나 여럿이서 배회하며 스트레스를 달콤함 속에 녹여내고 있었다. 민철 또한 오전에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다가도 오후에는 K-커피로 유명한 믹스커피를 마시곤 했다. 하늘과 거리를 내다보다 커피를 마시다 한숨을 쉬며 정태에게 말했다.
“어떤 광고 있잖아. 전부 예스 하는데 혼자서만 노우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오늘 회식합시다! 했는데... 막내인 직원이 저는 선약이 있어서 하면서 쿨하게 가버리는 거. 히히힛.... 이거 완전히 찐 사이다잖아! 근데 현실에서 저렇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그 광고만 봐도 시원하고 짜릿하더라고. 나도 저렇게 하면 어떨까.... 부장님, 이 프로젝트는 제가 한 거니까 적어도 제 이름은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러면 되지 않을까?”
정태가 민철의 귀여운 도발에 잠시 주춤거렸지만, 씩 웃으며 곧 이성을 찾았다.
“후훗, 그거야 이론적으로나 머릿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못하잖아... 그래서 오죽하면 미움받을 용기인지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겠어. 아마 그 저자도 우리나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 않을까. 남 얘기처럼 쉬운 게 어디 있어!”
“아, 그 책은 나도 읽어봤지. 일본인 철학자와 작가가 쓴 책이잖아... 잠깐 그 사람들 이름이 뭐였지?”
정태가 급히 핸드폰에서 후다닥 검색을 하고 나서 민철에게 말했다.
“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인 고가 후미타케...”
“그래 그 기시미상과 고가상도 그 책을 쓴 의도가 일본의 기업문화나 생활 속에 뿌리 깊은 무언가가 있어서 그랬을 거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동양권이라 조직문화에 서로 비슷한 면이 많잖아. 체면치레나 형식적 예절 같은 거에 얽매이고, 또 쉽게 거절도 못하고... 그러다 보니 자존감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는 거지.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 책에서는 그런 사람들한테 실제로 효용가치를 올려주는 행동의 동기부여를 해주는 거지!”
민철이 많은 것을 읽고 깨달으며 살아간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서 그 책이 엄청나게 팔리고도 2편까지 나왔잖아.... 2편까지 읽을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근데 문제는 책을 읽으면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막상 책을 덮으면 아무런 생각도 안 나고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 나만 그런가! 하하하...”
정태도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면서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니까.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출판되는 이유가 뭐겠어. 어차피 아무리 기막힌 이론과 방법론도 실행할 수 없거나 실행력이 딸리면 백약이 무효가 되는 거잖아. 그래서 작가들만 돈 벌고, 독자들은 책만 읽고 큰 도움은 안 되고... 흔히들 느낌만 발전하거나 자기 계발은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잖아. 뭔가 더 근본적인 방법은 없을까?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 같은 거 말이야.”
잠시 구름 사이로 해가 뻐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 민철 머릿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아! 그렇지. 그 친구한테 연락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민철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광화문 저쪽 파란 하늘을 쳐다보았다. 경복궁에서 인왕산 너머가 그림처럼 하늘아래 펼쳐져있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잡힐 듯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다가왔다.
민철이 반색하며 정태에게 말했다.
“음.... 고등학교 동창 중에 변호사 하던 친구가 전직을 했는데... 무슨 생각나무 주식회산가. 최근에 보니까 그 회사에서 신통방통한 것을 만들어 팔더라고. 사람들한테 생각을 심어주는 무슨 프로그램 같은 거. 나도 처음에는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냐고 했는데...”
잠시 뜸을 들이자, 정태는 재촉하듯 그래서?라는 묻는 시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철은 커피 한 모금에 목을 적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니까. 저번에 동창회 모임에 그 친구가 나와서 하는 말이 ‘생각나무는 과학입니다’, 그것도 최첨단 과학의 결정체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 예전에 무슨 침대광고에서 쓰던 카피처럼 말이야. 그 친구 말에 의하면, 실제 지극히 과학적인 메커니즘과 근거를 가지고 생각의 씨앗 같은 거를 만들어서 이거를 사람들의 의식에 주입한다는 거지.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허 참! 대단하지 않아. 생각이란 게 내 머릿속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외부 자극을 통해서도 생각하게 할 수 있다니. 하긴 우리가 생각이 많이 없지. 회사에서 일하는 거나 신변잡기적인 것처럼 아주 제한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생각 잘 안 하잖아. 그러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자존감에 상처를 받아도 이의제기를 하거나 항변을 못하는 거지. 그러고 보면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거랑 내면의 용기를 갖는 거랑은 일맥상통한 면이 있네.....”
그때 정태의 핸드폰이 울렸다. 누군가 살펴보던 정태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무실에서의 호출이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커피를 비우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민철은 먼저 내리는 정태에게 퇴근 후 한잔 하자는 표시로 손가락을 까닥했다. 정태는 급하게 움직이면서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며칠 뒤 저녁, 민철이 중학교 동창들과 모처럼 만나는 날이었다. 30대 초반의 직장인들이 모여 서로의 상황과 사정을 얘기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하 호호 거리는 친구들 사이. 서로 어깨를 두드리고 스스럼없이 술잔을 부딪친다. 역시나 중학교 동창들답다. 최근 예민해진 민철은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큰 흐름 하나를 감지한다. 비교사회.... 이런 단어를 누가 말했던가?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는 알겠는데... 민철은 대화 속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는 동창들끼리도 은연중에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하고 있었다. 은근한 속마음이 연봉과 회사규모와 장래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살고 있는 집의 크기와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비교의 도마 위에 올라올 날이 머지않았다. 친구들끼리도 이러할진대, 익명성을 띤 사람들 사이에서 번지는 부와 명예를 둘러싼 시샘의 흐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아득하다는 생각이 민철의 생각 사이로 흘러갔다.
친구들은 입사 연차가 비슷해도 서로 연봉과 직급이 달랐다. 고시출신들과 의사출신들, 금융기관과 대기업에 근무하는 친구들, 부모의 자산이 많은 금수저 출신 친구들은 그 자체가 자랑이었다. 서로 대놓고 비교하지는 않지만 대화 속에서 묻어 나왔다. 누군가는 호기롭게 자신이 1차를 쏘겠노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호응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가슴속에서는 그늘이 졌다. 부러워하면 지는 건데도, 부러운 표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고기를 굽고 술잔이 돌고 흥이 오를 무렵. 민철은 저쪽 테이블에 앉아있던 고민정을 발견했다. 문득 자신이 궁금해하고 아쉬워하던 최근의 고민이 떠올랐다. 마침 앞자리가 비어있어서 술잔과 젓가락을 들고 고민정의 앞자리로 옮겼다. 절친은 아니었지만, 중2 때 같은 반이었고 문예반 회원이어서 친밀하게 얘기를 건넸다.
“오! 잘 나가는 민정 잘살고 있었어... 간만에 얼굴 보이네. 로펌에서 바쁘다고 모임에 안 나왔잖아.”
“응... 민철이구나. 하하하. 잘 나가는 민정은 간지러운 문장이네. 그나저나 오래간만이네. 회사는 잘 다니고 있어. 저번에 친구들하고 통화하면서 잘 지낸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요새는 어때? 큰 회사여서 일도 많을 것 같은데....”
민철이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더니 민정의 비어있는 잔에 한잔 가득 부었다. 크리미 한 거품이 넘쳐흘렀다. 민철도 술잔을 들어 민정과 잔을 부딪쳤다. 뽀글뽀글 기포가 피어오르는 맥주의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흘렀다.
“응 그럭저럭 지내지. 너도 로펌에 있다가 다른 회사로 옮겼다고 하던데....”
“그랬지. 로펌은 재밌기는 한데, 생각보다 일도 많고 피곤한 업무가 많아. 소송 관련해서 부담도 크고... 클라이언트 비위 맞추는 것도 장난 아니야... 흐흐흐.”
“그래도 로스쿨 나와서 변호사 일 안 하고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특이하긴 하네. 너처럼 성적 좋은 변호사는 대형 로펌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애쓰잖아. 나 같으면 거기서 잘 버텨서 파트너변호사 하고 그럴 텐데... 너는 더 꿈이 커서 그러나?”
“오, 민철이 네가 로펌에 더 잘 맞는 인잰데 말이야!” 민정은 싱긋 웃으며 한 모금을 더 마셨다.
“사실 로펌 생활도 보람도 있고 의미도 있지만, 뭔가 갈증이 나더라고. 창의적인 면이 부족하기도 했고. 의뢰인들을 위한 돈 버는 기계가 된 거 같기도 하고 해서... 생각하던 차에 지금 회사에서 공채를 진행하길래... 얼떨결에 지원했더니 덜컥 돼버렸지 뭐니... 하하하.”
“아! 그랬구나.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해? 사내변호사 같은 거...”
“아니, 사내변호사 일만 할 것 같으면 그냥 로펌에서 일하고 있겠지. 여기서는 뭐랄까 좀 더 창의적이고 엘레강스한 그런 일을 한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일부는 변호사 역할도 하고 있지.”
“그 생각나무인가 하는 회사는 구체적으로 무슨 제품을 만들어 파나?”
“응, 간단히 말해서 어떤 생각의 씨앗을 파는 거지. 그 생각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생각일 수도 있고. 무슨 용기 같은 것 일수도 있고. 좀 더 어렵게 말하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메커니즘에 스스로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본을 제공하는 거지. 생각을 일으키는 마중물 같은 거.... 조금 허무맹랑한 소리도 들리지! 나도 처음에는 무슨 사기꾼 얘기처럼 들렸어. 하하하...”
민철은 자신도 역시나 그렇다는 듯 두 손을 들고 웃으며, 민정에게 최근 자신의 고민사를 요약해서 얘기했다. 자신의 경험을 포함해서 회사생활에서 갑질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상처받는 자존감을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지. 회사생활을 하던 학교를 다니던 남녀노소 안 가리고 자존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이런 애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냐는 얘기지.”
또렷한 눈동자로 민철의 얘기를 듣던 민정의 머릿속에서 어떤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자존감도 생각의 일종이지. 우리 뇌기능을 통해서 나오는 자신에 대한 믿을 같은 결과물이니까.... 그러네. 자존감을 강화시키기 위한 기제가 존재하겠네. 자존감을 일으키거나 강화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요법을 고민한다면....’
집중해서 듣고 있는 민정의 태도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민철의 목소리 톤이 훨씬 진지해졌다.
“내 회사 동기랑 얘기해 봤는데... 저기 미움받을 용기란 책도 있잖아. 너는 책벌레라서 아마도 읽어 봤을 거야. 그 책이 많이 팔렸던 것도 현시대의 사회생활에서 자존감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옆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 하나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왔다.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 눈짓으로 건배를 하고, 두 사람은 민철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떤 책을 읽어도 그때만 자극받고 시간이 지나면 책 제목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잖아. 가뜩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냄비근성 때문에 베스트셀러라면 사죽을 못 쓰고 일단 사고 보잖아. 나도 그러니까!!”
민철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으며 식탁 위에 있는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도 박수치며 민철의 얘기에 동의를 표했다. 친구들의 입모양에서 그러게 누군들!이라는 말풍선이 그려졌다. 대화에 끼어든 친구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런 학구파들 같으니라고. 여기서도 멋들어진 얘기 하느라 술도 안주도 안 먹고 있네. 근데 민철이 얘기처럼 제 아무리 유명한 책 한 권을 대충 읽고 어떤 생각이 변하거나 인생이 바뀌지는 않을 거야. 오죽했으면 예부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얘기가 있겠어! 수없이 여러 번 읽고 이해해야 몸과 마음에 체화되는 거잖아. 그럼에도 우리는 성급하게 두어 번 읽은 다음에 지식으로 그것을 뽐내다 보니까 한여름에 얼음 녹듯이 사라지는 거지.”
역시나 대화에 스며든 친구는 학창 시절 독서왕으로 유명했던 성현수였다.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깨닫고 문학을 전공해서 현재 서울 모 대학의 교수로 있는 친구였다. 중고등학교시절부터 쓰고 읽는데 이 친구를 따라갈 사람이 거의 없었다. 민정이 옆자리를 슬쩍 쳐다보며 찬사를 날렸다.
“오, 문학소년 현수... 역시나 녹슬지 않았네. 날카로워... 호호호. 학생들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하지. 친구 적성에도 잘 맞을 테고.”
“그럭저럭 지낼 만은 해. 요새 학생들이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으로는 워낙에 관심이 없어서 똘똘한 친구들이 많이 보이질 않아. 공부 좀 한다 치면 다들 의대나 법대 공대로 진학하는 바람에... 우리 때랑 십몇 년 차이밖에 안 나는데 이렇게 세상이 변했네. 민정이 너도 이쪽으로 공부해서 대학에 남았으면 좋으련만. 후다닥 로스쿨로 로펌으로 가더니만은.... 무지 아쉽네.”
민철도 콕 박히는 현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 한 병을 뻥 소리 나게 따서 두 사람의 술잔에 넘치게 부었다.
“그러니까. 민정이도 전형적인 학구파여서 그쪽으로 공부했어도 지금쯤 잘 나가는 교수님도 되었을 텐데. 우리 고등학교 때 민정이 얘기 많이 했잖아. 공부 잘하던 민정이가 갑자기 특성화고로 진학해서 왜 그랬을까? 궁금해했다고... 한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민정이 일하는 곳도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어서... 그냥 대학 다닌 친구들보다 경험도 많고 더 실질적인 일을 한다고 말해야 될까... 민정아 그렇지?”
두 친구의 느닷없는 칭찬에 싱긋 웃는 민정. 어깨를 으쓱하며 좌우 친구들을 둘러보며 에둘러 말했다.
“그러게. 내가 고등학교 선택했던 것은 집안사정 때문에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후회하지는 않아. 그 덕분에 남들은 경험하지 못할 과정을 지나오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우리들 진로가 내 맘처럼 쉽게 되지도 않고 결정하기도 어렵잖아. 중고등학교 때 유난을 떨며 고민 고민해도 십 년 뒤에 보면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 걸 보면... 민철이 말대로 나는 연구 체질보다는 현장 체질인 거 같아. 로펌을 그만둔 것도 틀에 얽매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게 제일 큰 문제였거든. 재판과정에서 변호사 역할이 한정적인 면도 있고. 지금 우리 생각나무 일이 나한테는 잘 맞는 거 같아. 순간순간 가슴이 콩콩 뛰거든...”
오! 주위의 친구들이 민정의 가슴이 콩콩 뛴다는 말에 뭔가 부러운 표정들을 지었다. 민철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콕 쥐어박으며 중요한 걸 놓친 듯이 급하게 말했다.
“잠깐, 얘기하다 보니 정작 내가 질문하고 싶은 거를 못하고 있네. 계속 삼천포로 빠지다 보면 오늘 밤늦게 남해안 바닷가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을 것이고... 아까 내가 얘기했던 것처럼 사회생활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자존감이 다운되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잖아. 그런데 한번 다운된 자존감 회복하기가 쉽지가 않아서.. 흔히들 기가 꺾인다는 표현이 맞을 거 같은데. 이럴 때 미움받을 용기 같은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거절하기도 하고 손절하기도 하면서 자존감을 업 시킬 수 있는 손오공 여의주 같은 방법이 있겠냐 하는 거지. 민정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네가 아까 말할 때 속으로도 어림셈을 해보았지. 무언가를 만들려면 수요와 필요가 있어야 되잖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누가 말했더라. 실없이 웃지 말고... 아무튼 그래서 생각이라는 범주에 자존감이나 자존심을 포함시킨다면 우리 회사가 표방하는 자존감의 씨앗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아까 전에 말이야. 우리 회사가 만들어서 히트를 친 상품 중에 중2병 테라피라는 제품이 있는데... 이 제품을 만들 때도 지금처럼 우리 사회의 현상과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었거든.”
중2병 테라피라는 얘기가 나오자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놀란듯 서로를 쳐다봤다. 그만큼 유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얘기를 듣고 있던 현수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그 중2병 테라피가 너네 회사에서 만들어낸 거구나. 내 조카 중에 유난스레 중학생 입네 과시를 하는 애도 그거 다운받아서 우리 형수님이 엄청 좋아하던데.... 그게 효과가 좋다고. 별게 다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민정이네 회사에서 만들어낸 제품이구나. 회사이름이 뭐라 그랬지?”
“응, 생각나무 주식회사... 무슨 동화책 제목 같기도 하지! 생각을 만들어 내고, 정확히 말하면 생각의 씨앗을 만들어 내는 건데. 세상에... 우리 대표님이 초등학생 때 생각해 낸 회사라지 뭐니.”
“아무튼 민정이 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니까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도 있을 거 같아. 부디 연구하고 분석해서 우리의 상처받은 청춘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면 어떨까? 우리의 여신님.”
현수가 우리 여신님 하며 술잔을 높이 올렸다. 쨍하고 허공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친구들이 그려나가는 이야기꽃은 계속 피기만 할 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민정의 기억 속에는 긴 생머리로 여신이라 불리던 중학교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여신이 여자귀신도 아니고...히히히. 그러고 보니 문학박사님이신 현수한테도 업무상 조언을 구해야 할 게 있을 거 같은데. 나중에 따로 연락할게. 엄청난 대왕 책벌레인 우리 대표님도 가끔씩 인문학문적인 조력이 필요하다고 얘기해서 말이지. 그때가 오면 바로 도움 좀 돼 주셔. 한턱 단단히 쏠 테니까...”
문제를 제기한 민철은 얘기가 좋은 방향으로 흐르자 기분이 좋아졌다. 말하는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그 한턱낼 때 두 사람만 만나지 말고 나도 불러라. 인간 아닌 책벌레들의 모임이 되지 않으려면...”
하하하. 책벌레들의 모임이라. 세 사람이 공중에서 손바닥으로 크게 하이파이브하며 웃자, 주위 친구들이 놀란 듯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