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고민정은 민철이 얘기했던 주제를 소가 되새김질 하듯 계속 곱씹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술 취한 취객 여러 명이 꾸벅이고 졸고 있었고, 창밖은 짙은 어둠에 싸인 한강 위를 지나고 있었다. 어둠의 심연과 도도히 흐르는 강물. 고민하기 좋은 밤이었다.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고민정은 안대표를 찾았다. 마침 두꺼운 책을 읽고 있던 안대표와 커피를 마시며 어제 이야기를 꺼냈다. 여차저차 고민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보니까 대부분의 청춘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처방이 필요하다. 우리 회사 차원에서 자존감에 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나눌 시기가 된 거 같다... 는 얘기를 했다.
안대표는 휴대용 탭에 메모하며 고민정의 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생각나무는 계속해서 직원들과 외부 제안을 통해서 제품을 개발하다 보니 단태는 가볍게 스치는 말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인드맵과 익살스런 그림을 통해 농담까지도 기억하려 했다. 그 덕분에 기획과정에서 예리한 조언과 완성도 높은 기획안을 만드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얘기를 끝낸 고민정을 쳐다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이런 표정은 자신이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라는 걸 말했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애써 숨기지도 않는 스타일의 안대표. 대화 상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눈빛과 두 손, 얼굴표정까지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오늘도 대화가 흡족한 모양인지 크게 웃으며 고민정의 얘기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에 기막힌 제안 같은데요. 음... 그냥 하는 칭찬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주제 같네요.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문화가 팽배한 사회구조 속에서 억압당하는 이들의 상처는 개인들의 몫으로 돌리는 게 그동안의 우리 인식이었잖아요. 이제 그런 맹목적 관행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 같기는 해요. 다만 어떻게 이걸 꺼내고 공감시키고 공론화시키는 것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거창한 시작보다는 개인들의 자존감 회복과 확보를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게 그 첫 시작일 듯합니다. 그러면 이 테마는 고팀장님이 기획팀과 상의해서 진행해 봄이 어떤가요?”
안대표가 상큼하게 눈을 치켜뜨며 고팀장을 향해 진지한 제안을 했다. 파급효과가 상당히 큰 주제라 틀과 내용을 채워 놓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다방면에 관심과 그에 걸맞은 열정과 능력을 가진 고팀장이 적임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고민정 또한 주저하지 않고 쿨하게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런 창의적 기획은 자신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생각나무 주식회사에 들어오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친구들 그리고 많은 청춘들의 고민거리를 위해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양하게 검토 분석해서 다시 기획안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점심은 어디로 가세요?”
갑작스러운 고팀장의 점심 제의에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뜬 안대표. 잠시 일정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무슨 연유일까? 갑자기 점심을 묻다니... 내가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선수를 뺏긴 걸까? 얼른 핸드폰 일정표를 살폈다.
“아, 스케줄을 보니 오늘 점심은 별다른 일정이 없네요. 저는 콩국수가 당기는데 어떤가요?”
저번 냉동삼겹살 회식 때 고팀장이 콩국수와 두부요리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흘러 듣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낮 기온이 28도라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아니었지만, 살짝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날씨. 콩국수가 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콩국수는 남녀가 먹기에는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부질없이 떠올랐다. 방금 자존감과 용기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이런 밥 먹자는 얘기도 못하면서 무슨... 가슴속으로 쓴웃음이 올라왔다. 고팀장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대답했다.
“네, 그러실까요. 다른 약속이 없으시면 같이 드시죠. 콩국수 좋네요. 조금 빨리 11시 40분쯤 뵙죠. 저쪽 뒷골목 칼국수집 아시죠. 미슐랭 스타를 거부한다는 식당이요. 그 집은 예약도 안 되고 웨이팅 할 수도 있어서요.... 호호호”
고팀장의 능글맞은 웃음소리에 안대표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가 되었다. 저쪽에서 먼저 물었는데 이쪽에서 당황하는 것은 주객이 바뀐 게 아닌가 싶었다. 일단은 하던 업무는 마무리해야 되겠지 라는 표정으로 고팀장을 향해 어색한 손짓을 했다.
“그... 그러죠. 그 시간에 1층 로비에서 보기로 해요. 혹시 다른 직원들이랑 같이 할까요?”
“아뇨,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하니까 둘이서만 먹기로 해요... 그럼, 이만.”
씽긋하며 돌아선 고팀장의 뒷모습에 훈풍이 불었다. 안대표는 무슨 신기루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서는 고팀장의 긴 생머리가 유난히 빛나보였다. 언제부터 그랬지? 안태표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래, 저번에 그 맥줏집. 예전의 이야기들.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연들. 그때부터였던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고팀장은 어젯밤부터 미리 만들어 놓은 체크리스트를 다시 꺼내 들었다. 수요자들의 애로사항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고 두 번째는 입체적인 분석이다. 간지러운 곳만 긁어주어서는 안 되고, 묻지 않은 것도 파악해서 긁어줘야 한다. 제대로 된 수요 파악이란 그런 것이다. 그래야 잠재적 수요자와 소극적 수요자들, 미래의 수요자들의 욕구까지도 판단할 수 있는 데이터가 나온다. 정확히 묻고 섬세하게 분류하고 속뜻까지도 파악한다면 금상첨화다. 일단 자신이 기획안 초안을 만들어 아이디어 뱅크인 기획팀장을 찾아갈 요량이다. 어디 볼까?
‘우리 사회의 어떤 측면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걸까. 어떤 상황이 자존감에 관련되고, 어떤 요인이 업다운에 적용되는 것일까. 그런데 자존감은 뭘까.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아들러는 어떻게 인간의 심리를 파악했길래... 일본의 철학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자존감과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렸을까.’
아주 많은 것이 궁금했다. 몇 가지 이어지는 단순한 지식으로 해결할 논제는 아닌 것이다. 몇 편의 박사논문을 쓸 고민을 해야 풀릴 문제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파고들 문제도 아니었다. 회사 생각의 원천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 놓은 지식의 정수가 모여 있는 저수지가 아니던가.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된다.
‘아마도 개인심리학에 관한 주제는 대표님 전공이니까. 모르는 부분은 물으면 될 것 같고. 역시나 이 주제 또한 불편한 이들에게서 수요 파악이 관건이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자존감을 유지하는 것도 문제고, 자존감이 없는 이들에게 그걸 심어주는 것은 더 큰 문제일 텐데....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고민정은 개인의 자존감을 형성하는 얼개를 짜고 세세한 요소를 추려냈다. 이 또한 이론적인 결론과 각 개인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서로 불합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좀 더 살펴볼 구석이 많았다. 그다음은 생각의 원천에서 각 요소에 따른 상관물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구체적인 실재를 구성해 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실재의 씨앗을 구상하고 배양할 준비를 갖출 수 있다.
생각나무가 보유한 생각의 원천은 방대한 지식창고다. 한마디로 인류지식의 결정체이자 정수다. 단순한 지식 집약체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통한 분류와 분석, 해석과 적용까지 가능한 고도 지능을 가진 슈퍼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로 어떤 질문을 하든 간에 즉답을 해준다. 안대표의 설계에 따르면 상식 수준부터 우주항공이나 의학, 물리화학에서 생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전문가적 식견을 보여준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챗GPT는 생각의 원천이 가진 원시적 기능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대단한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인가. 미국과 독일 유학시절 각국의 연구소와 여러 첨단 하이테크 회사들이 안대표의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가는 설명이 불필요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 사업을 위해 그 어떤 조건의 스카웃도 거절했다고 한다.
외국 언론이 극찬하기를. ‘안단태, 한국이 낳은 천재로 스티브 잡스, 빌게이츠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 그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원천은 철저한 베일에 싸여 그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 명상프로그램이나 수면프로그램 음악을 만들어내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 정도면 바닷가 모래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마저도 생각의 원천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고민정은 기획팀과 생각의 원천의 도움을 받아 자존감에 대한 뿌리와 씨앗을 발견하기 위한 기획안을 작성했다.
제목은 자존감 UP 테라피, 일명 이쁨 받을 용기 프로젝트.
고팀장은 기획팀과 사회적 환경과 특성을 분석하고 자존감과 관련된 개인의 내면이 당면한 현실을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그 과정은 계속적인 질문과 응답과 시험적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생각의 원천에서 자료와 결과물을 얻었다. 고도화된 생각의 원천은 모든 작업과정을 혁신적으로 단축시켰다.
생각의 원천은 니체와 아들러의 철학의 결합을 권했다. 그 둘의 분석틀을 기본으로 하되 자유와 행복이 자존감의 뿌리임을 강조했다. 자유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와 자기 내면의 평가로부터의 자유 중 전자의 자유를 강조했다. 타인에게 인정받기보다는 스스로의 주관적 결정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자기 주체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의 삶에 자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 세계관이 필요했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타인들의 시각에 갇힌 자아가 아닌 자신만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자신감이 자존감이다. 따라서 능력과 관계의 문제를 개인의 자존감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자존감에 관한 용기를 심어주는 메커니즘을 개발해야 한다는 게 생각의 원천의 조언이었다.
고팀장과 기획팀은 자존감의 씨앗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거듭했다.
“그니까 자존감이란 게 나를 사랑하고 불필요한 비교를 거부하고, 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일단 우리도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도 끊임없이 환경과 상황에 불평하고 불편해하잖아요.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환경을 문제 삼지 않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해서 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면 되는데... 이게 잘 안되니까. 결국 우리의 연구와 성과물이 필요하겠죠. 허허허.”
“생각해 보면 생각의 원천이 니체의 철학을 추천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는 해요. 인간과 인간성의 고귀함을 존중키 위해 신도 부정하는 상황에서... 타인의 평가를 거부 못할 이유는 없거든요.”
“따지고 보면,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의 뿌리는 인본주의 심리학이잖아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의 논리를 넘어서는 공동체의식과 사람을 통합적인 존재로서 개인의 독자성을 부각시킨 철학이다 보니... 자기가 자기 스스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관계없이요.... 니체나 아들러, 멋지지 않나요?”
“생각의 원천이 제시한 문제점 중에 이런 것도 있었어요. 아들러 심리학이나 미움받을 용기를 읽은 독자들의 의견과 태도를 분석한 결과, 지속성이 없는 충동적 깨달음은 개인의 태도변화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자존감이 뿌리내려 자리를 잡을 때까지 지속적인 자극이 필요하다는 중요한 지적을 해줬죠.”
이런 학자연한 대화를 통해서 고팀장은 기획안의 가닥을 잡고 세부사항은 생각의 원천 데이터와 기획팀의 조력을 받아 작성했다. 자존감을 북돋게 하는 활력리듬에는 다양한 시도를 했다. 행진곡부터 웅장한 교향악과 뉴에이지 음악까지 대입 수능시험 당일 들어도 좋을만한 음률로 가득 채웠다. 인간은 음악과 리듬에 반응하는 가장 잘 반응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었다. 개발팀에서는 한층 다채로워진 생각의 원천의 능력을 반가워하며 테라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콩국수를 점심으로 먹은 날로부터 한 달 뒤. ‘자존감 업 테라피’의 기획안과 시제품이 공개되었다.
제품 공개를 보고받은 안대표는 콩국수를 먹던 점심을 소환했다. 그때 두 사람은 재빨리 서두른 덕분에 기다림 없이 구석 쪽 한 테이블을 확보했다. 고팀장은 휴 가쁜 숨을 내쉬며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콩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오픈 주방이 유행이어서 그런지 주방에서 바쁜 손놀림이 보였다. 숙성된 면발을 끊이는 주방 안은 뿌연 수증기가 가득했다. 국내산 서리태콩을 삶아서 갈아낸 콩물은 진국이었다. 살짝 소금간만 더하면 어떤 조미를 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다른 건으로 실랑이를 벌였다. 최소한의 간만 되어있는 콩국수에 설탕을 넣을 것인지 아니면 소금을 더 넣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결국 조금은 불어 터진 면발을 후루룩 먹을 수밖에 없었다. 크게 한입 먹으면서 고팀장이 말했다.
“콩국수에 얼음을 넣으면 안 돼요. 얼음이 녹으면서 콩물의 농도가 묽어지면 맛이 떨어지거든요. 처음부터 같이 갈면 괜찮기는 하겠지만.... 어때요 맛있죠. 엄청 찐하고 고소한 맛까지...”
“그렇죠. 콩물은 즉시 만들거나 보존이 잘못되면 물과 콩물이 분리되잖아요. 거기에다 얼음까지 넣으면 별로죠. 개인적으로는 면발도 소면보다는 칼국수 면이 좋은 거 같아요.”
“후훗... 이 집은 칼국수 면도 미리 뽑아서 숙성시키고 매콤한 배추겉절이도 그날그날 만든다고 하네요. 요 맛있어 보이는 양념 좀 보세요...”
맛에 서로의 선호가 다르기도 했지만, 상대방의 기호를 알아간다는 측면에서 두 사람이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각자가 자라온 집안의 음식도 달랐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주장이 뚜렷한 까닭이었다. 양보한 듯 아닌 듯 설득당할 듯 말 듯한 사소함 속에서 두 사람의 의견은 불꽃을 튀겼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시선은 콩물의 진득함을 넘어 하나의 끈적끈적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안대표는 고팀장을 생각하면 긴 생머리와 커피가 떠올랐다. 채용 면접 때 봤던 당돌함과 똘망함 속에 이런 소소한 기호까지 겹치니... 무언가 뭉클하게 움직였다. 더 많은 것이 떠오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잠시 벙긋 속웃음이 새어 나왔다. 창밖에는 여름 소낙비가 후드득 내리고 있었다. 창문에서 파동처럼 번지는 빗소리에 안대표의 맑은 웃음이 어릿어릿 비췄다. 고팀장은 무슨 생각으로 콩국수를 먹자고 하였을까?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안대표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기획팀장과 고팀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이미 사내 챗망으로 보내온 기획안은 충분히 읽어본 뒤였다. 세 사람은 분석 검토에 얽힌 뒷얘기를 나눴다. 실무진에서 최대한 충분히 검토분석하고 보고는 최소화시킨다는 생각나무의 방침은 늘 통했다. 안대표는 고팀장의 눈길을 은근히 피하면서 기획팀장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 어떤 사회보다 비교라는 많이 하죠. 경쟁이 거세지다 보니 비교대상이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고... 회사나 연봉, 집이나 차 브랜드는 물론이고 어디에 사는지 까지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살아가다 보니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이 부정적인 면이 더 커질 수밖에 없지요. 이런 문화 속에서 개인은 위축되다 보니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을 드러내는 것도 힘들도,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도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고... 저도 늘 느껴온 거지만, 혹시나 우리 회사에도 이런 부분이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우리가 모른 부분에서...”
“아마도 아무리 조직문화가 좋은 회사라 해도 개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여러 가지라 그 여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죠. 하지만 개인의 감정에 너무 충실하다 보면 객관성이라든가 밸런스를 상실할 우려도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죠.”
“어차피 밸런스는 개인의 몫이죠. 이 제품은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자존감의 문제가 감정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보정작용을 했습니다. 엄연히 감정과 사고의 영역은 다르다 보니 이 서로 혼동할 우려가 없도록 하는 게 중요했죠!”
안대표는 두 사람과 대화를 통해서 검토 단계에서부터 참으로 깊은 생각을 하는구나! 라며 감탄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보고 마음껏 박수를 보냈다. 안대표의 만족하는 눈빛을 보고는 고팀장이 시험 적용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시제품을 만들고 이미지화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시험대상자들을 모집해서 적용했거든요. 물론 처음 실마리를 던져준 제 친구들과 여러 회사의 신입사원들이 대거 참여했더랬죠. 기획팀과 개발팀의 협조를 얻어 매일 일정한 신청자들에 대해 적용한 결과, 3회 이상 테라피를 사용하면서 개인들의 변화 감수성이 급격히 증가하는 결과치가 있었습니다.”
기획팀장이 뒤이어 말을 이었다.
“특히 20~30대 청년층에서 적용 전후의 결과치에 대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물론 10대 후반의 고등학생들도 좋긴 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존감이 낮아진 경험이 그 반응률에 영향을 미친것 같습니다. 특이하게도 40~50대에서도 아주 안정적인 긍정적 결과가 있어서 그분들의 상황을 설문조사했더니... 가정이나 사회생활에서 불안감과 불편함이 많았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특히 여성분들은 경력단절과 가족들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이 본인들의 자존감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팀장과 개발팀장님과 여러 의견을 나누면서 다양한 연령대에 맞는 버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의견까지 나눠서 현재 개발팀에서 연구 중에 있습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고팀장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최근에 개발팀 얘기가 각종 테라피를 사용하는 이용자의 적용 변화 정도를 체크해 주고 독려해 주는 시스템까지 장착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기존에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변화정도를 수동적으로 인식했다면 최신 버전에 의하면 생각나무 앱에서 쌍방향으로 소통하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인 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용자들의 반응도 아주 좋구요. 대표님, 생각나무 원천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안대표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하하. 고팀장님. 최근 AI성장 속도가 엄청나잖아요. 우리 생각나무 원천도 그런 트렌드에 부합해야죠. 두 분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인공지능의 능력은 시스템 가속화의 문제거든요. 저도 그래서 그 부분을 계속 신경 쓰면서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반도체 업체에 특별한 주문을 넣고 있구요. 그쪽 회사 관계자들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갈수록 제가 요청한 사항 때문에 자신들의 기술이 진일보하고 있어서 박수를 보내고 있거든요... 수요가 기술을 선도하는 그런 상황이죠. 그리고 두 분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런 방향설정도 좋은데요.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하면 다양한 연령대에 적합한 테라피를 개발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네요.”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안대표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한편으로 우리사회시스템이 개인의 내면에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에 너무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과도한 경쟁과 승자 위주의 사회경제적 논리가 개인들에게는 상처와 좌절을 주는 사회적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늘, 왜,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였다.
드디어 ‘자존감 UP 테라피’가 출시되었다. 일명 ‘예쁨 받을 용기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제품은 즉각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미움받을 용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사회적 분위기 탓에 여러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생각나무의 명성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특별한 광고 없이도 금방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쇄도했다. 각종 SNS를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중2병 테라피와 중년 갱년기 테라피의 대박 후속타로 회사 홈페이지 후기에도 댓글이 풍년을 이뤘다.
“방황하는 저에게 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절할 수 있는 자유, 관계로부터 자유를 알게 해 주셔서 핵 감쏴...”
“내돈내산, 진심 후기입니다. 제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 자신의 소중함을 새까맣게 잊고 살아온 거 같아 많이 속상했답니다. 이제부터라도 제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보겠습니다.”
“그동안 주위 사람들과 비교한 시간이 아깝습니다. 나 자신으로 당당히 다시 설 수 있게 해 주신 생각나무에 진심으로 꾸벅입니당^^”
“회사 막내라고 회식도 거부 못하고 떠밀려 일도 하고 했는데, 좀 더 합리적으로 제 자신을 말할 수 있어서 많이 편안해졌네요. 고맙습니다. 추가로 엄마를 위해 중년 테라피도 구입하였답니다...”
“생각나무 덕분에 나를 사랑하고 비교를 거부하게 돼서 좀 더 내 자신에게 충실한 삶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서 펑펑 터지는 음악리듬이 저를 살아있게 하고 설레게 하는 게 이게 무슨 마법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번아웃 상황인 저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회사생활과 대인관계가 힘들었는데... 자존감이 업 때문인지 훨씬 편하게 생활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무엇보다 밤에 숙면할 수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내 자존감을 향상시키면서 오히려 주위 분들과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제 자신의 태도도 명확해지고 의견전달도 분명 해지다 보니 대화가 즐거워졌습니다.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주위 친구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생각나무 여러분!”
“저는... 이름만 말해도 다 아는 연예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감당하지 못할 영광도 얻었지만 저에게 남은 건 공황장애였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그동안 저를 빛나게 했던 것은 제 자신의 자존감이나 행복보다는 주위를 의식했던 욕망이었습니다. 이번에 생각나무에서 만들어주신 자존감 업 테라피는 저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타인의 평가를 거부할 수 있는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주위에 저와 같은 이유로 고통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에게도 적극 권유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국내외의 여러 신문사와 방송사, 주간 월간 잡지사 기자들이 인터뷰를 원했다. 생각나무의 제품의 반응이 폭발적인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생각나무의 원천 기술과 제품 개발과정에 대한 기획 기사를 원하는 언론사가 여럿이었다. 해외 언론에서도 미국의 빅테크 업체들도 따라 할 수 없는 대단한 성과라고 하면서 한국적 AI의 기술의 우수성을 재평가했다.
민수경 마케팅 팀장은 제품 인기 때문에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때문에 고민정 팀장이 외부 인터뷰는 전담하기로 해서 제품 개발 배경과 그 반향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덕분에 고팀장은 여러 방송사와 언론사의 섭외 1순위가 되었다. 출연이나 인터뷰 문의가 계속되자, 이를 거절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생각나무 내부의견이 있었다. 우리도 거절할 자유가 있다는 이유로...
안대표는 한층 바빠진 고팀장의 모습을 보고는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최근 고팀장의 일정은 몸이 두세 개 되어야 할 정도로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팀장을 생각하는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고팀장, 아닌 고민정에 대한 감정에 대해 자신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어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사랑이란 것이 이런 느낌일까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 또한 자존감 업 테라피의 영향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