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뉴스에서 속보가 떴다. 용감한 군인 프로젝트 일파만파, 국방부 장관 사퇴...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최근 국방부에서 용감한 군인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인간병기를 만들고자 했다고 소식을 전해드린 바 있습니다. 이 사안은 국내외에 많은 논란과 문제제기를 받고 있습니다. 인권과 전쟁윤리 등에서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는데요. 현재 여당 내에서도 일부 중진 의원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정부에 전달하고 누군가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이 문제 많은 사안에 모든 책임을 지고 국방부 장관이 오늘 사퇴하기로 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국방부 브리핑 룸에서 국방부 대변인이 사퇴에 관련된 경과를 얘기하고 바로 국방부장관이 사퇴 인터뷰를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간 고민정 팀장은 법무팀 막내와 생각의 숲에서 초콜릿케이크에 찐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오늘 카페에는 초콜릿케이크와 호두파이가 제공되는 날이었다. 서울시내에서 가장 맛있다는 전문점에서 바로 배달받은 것들이다. 아침을 대충 먹은 직원들에게 조각 케이크의 인기는 최고였다. 과하지 않는 단맛과 적당한 양이 시장기를 달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구내 카페에서는 매일 간식거리를 바꿔서 제공하고 있다. 차나 커피음료에 적합한 한입거리를 주로 내놓는다. 카페에는 오전 오후 수시로 당분 보충을 위한 직원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언제부턴가 속보의 개념적 정의가 변했다. 국가나 정부 관련되는 뉴스거리는 모두 다 속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꼭 알아야 될 필요도 없는데...라고 고팀장은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용감한 군인 프로젝트 관련해서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점 때문에 찝찝했던 차였다. 국방부랑 엮여서 생각나무가 비도덕적인 기업으로 인식되거나 돈만 밝히는 자본주의적 화신으로 알려지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공익 제보한 그 연구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커피 한잔을 추가해서 안대표의 방으로 향했다.
안대표의 방으로 들어서자 김도윤 기획팀장과 뭔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시나몬 향과 커피 향이 실내에 돌고 있었다. 커피를 두 잔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머쓱했지만, 다행히 김팀장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고팀장은 국방부 장관 사퇴가 속보도 떴다고 말했다. 안대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고팀장님이 가져다주신 커피가 향이 좋은데요... 허허허. 국방부장관은 사퇴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사안이 너무 커져버려서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더 높은 한 사람이 책임지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잖아요.”
“대표님 그런데, 국방연구소의 안연구원인가 그분은 어떻게 될까요? 검찰에서 기소한다고 그랬잖아요. 수사를 제대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공익제보나 양심고백 한 분들을 우리 사회가 보호하지 못한다면 누가 그런 훌륭한 행동을 하겠어요. 참 안타까운 일인데...”
기획팀장이 고팀장에게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김도윤 팀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렇잖아도 방금 대표님이랑 그 얘기했거든요. 양심제보와 국방부, 무기정밀화학과 우리랑 서로 엮어있어서 그 연구원만 손해 볼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국방부에도 없는 이미지 재생 결과 데이터가 있구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들이 우리의 바람을 대신 이뤄주지 않았을까요? 국방부나 정부를 압박하고 장관 사퇴까지 이어질 수 있게끔...”
고팀장은 기획팀장의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무슨 연유이기에, 아니 어떤 존재들이기에, 어떻게 누구를 압박했기에... 그게 장관 사퇴로 이어지지... 하는 표정으로 안대표를 바라봤다.
안대표는 겸연쩍한 웃음을 짓고는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 이런 사안은 공식적으로나 법적으로 진행되면 답이 없거든요. 국방부나 검찰을 압박할 수도 없고요. 오리발을 내밀거나 발뺌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필요한 거죠. 아마도 정체불명의 해커집단이 국방부를 해킹해서 비밀계획과 관련된 정보를 빼내고 이를 외부에 공개한다는 식으로 국방부와 무기정밀화학에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그 속의 데이터는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 결과일 테고, 그 출처는 국방부와 무기정밀화학이다... 만약 이 사건을 계속 진행할 경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게끔 각 언론사에 인터넷상에 뿌리겠다는 말을 반드시 첨부했겠죠.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양심 고백한 연구원을 법적 구속에서 풀어줘서 보호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계획에 최고위급에서 정치적 책임을 져라... 이 두 가지 조건으로 해커집단이 딜을 한 거겠죠. 최근에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문제제기를 계속하고 있잖아요. 그 소스도 그 친구들이 주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아마 정부는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덮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거예요. 보이지 않은 해커들이 디지털 약자도 아니고 인터넷 공간에 무슨 험한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안대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커피를 마셨다. 고팀장은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런 내막이 있었다니, 무슨 영화도 아니고, 현실세계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표정으로 안대표를 조급하게 응시했다.
“처음에는 정부 관계자들도 주춤했을 거예요. 이게 뭔가? 애들 장난이 아닐까 하고 여러 정보 루트를 통해 알아봤겠죠. 특히 경찰청 사이버수사팀이나 국정원 정보파트를 통해 해외 활동 해커들의 움직임까지 살펴봤겠죠. 그런데도 국방부를 턴 해커들이 오리무중인 거였죠. 사실 그 친구들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거든요. 경로를 수십 개에서 수백 개까지 거쳐서 움직이는 인터넷 동선을 추적한다는 것도 어렵구요. 국정원에서도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렇게 보고를 했다고 해요. 추적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해커들의 소행은 분명하다. 비공개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VIP에게 전달이 됐겠죠. 거기에 국방부 장관 사퇴와 검찰 수사 중단 등이 논의되어서 오늘 장관 사퇴까지 이어진 거죠.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자. 아마도 그런 얘기를 했을 거예요. 전 세계 인터넷 망에 이런 전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해 보면 끔찍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 한 꺼풀만 벗기면 엄청 쫄보들 많거든요. 죄지은 것도 많구요. 허허허.”
안대표의 얘기에 고팀장은 무슨 스파이 영화 한 편을 본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대표가 마치 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해서 더 놀랐다. 엄청난 한기가 몰려온 듯 온몸에 갑자기 전율이 일었다.
“오! 이런 게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니 놀라운데요. 온몸에 소름이 쫙 오르는 게 기막힌 반전인데요. 마치 첩보스릴러 영화 한 편을 요약해서 본 거 같아요. 그런데 007 영화나 첩보 영화 속 빌런들은 꽤나 악독하고 집요하잖아요. 우리 현실의 악당들은 욕망은 크지만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쉽게 포기하기도 하는가 보네요... 히히히.”
기획팀장이 고팀장의 빌런 얘기에 낄낄대며 웃었다. 안대표도 적절한 비유라며 현실 속 악당들의 영악함과 유약함을 한꺼번에 비웃었다. 고팀장이 웃음에 편승하며 한마디를 더 던졌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 영화 속 빌런을 응징하는 해커 아니 영웅들이 존재하는 거네요. 주로 해커들은 장난이나 나쁜 짓 좋아하는 컴퓨터 천재들인 줄 알았는데 조금 색다른 면이 있네요.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혹시나 국방부나 그쪽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우리도 도덕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자칫하면 비인권적 기업이라는 오명을 쓰고 생사존망의 기로에 설 수도 있었겠죠. 참으로 다행입니다. 대표님, 김팀장님... 그런데, 혹시나 그 해커들 아는 분들은 아니죠?”
고팀장의 느닷없는 질문에 안대표와 김팀장은 마주 보고 실없이 웃었다. 기획팀장은 설마요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 뼈 있는 눈빛이 오갔다. 고팀장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서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비밀이 필요한 곳에는 반드시 그럴듯한 비밀이 존재해야 하는 법이다.
그날 오후에는 국방부 장관의 사퇴에 이어 정부가 용감한 군인 프로젝트를 폐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통령이 사과한다는 소식은 없었다. 물론 국방연구소 안종근 연구원에 관한 모든 고소 고발은 취하됐고, 다시 연구소로 복귀했다는 훈훈한 소식이 덧붙여졌다. TV화면에서는 실천시민연대에서 시민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는 안 연구원의 모습이 비춰졌다.
고팀장은 인공지능과 씨름하는 유약한 존재인줄 알았던 사람들이 보여준 의연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담담하게 영화 같은 스토리를 말하던 안대표의 얼굴이 그렇게 믿음직스럽게 느껴질 줄 몰랐다. 회사 내에서나 회식 자리에서 시큰둥하거나 시니컬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둘이서 맥주 마실 때는 어떤 캐릭터였지... 그냥 보통의 남자처럼 보였는데. 그동안 진짜 자신의 얼굴을 숨겨왔나. 고팀장은 여러 가지 쇼킹한 상황 때문에 업무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오후 내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실천시민연대에 있는 소현희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근에 벌어진 사건과 관련해서 상당한 시간 동안 다양한 얘기를 했다. 소변호사도 그쪽 동정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글쎄,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민연대 사무실 주위에도 수상한 사람들이 많았거든. 딱 보면 알잖아. 그런 느낌 있는 부류들. 이럴 때는 기자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조심해야 하거든. 이 친구들이 별별 신분으로 위장해서 우리랑 접촉을 시도하니까. 혹시나 우리가 그 연구원을 보호하고 있거나 뭔가를 캐려고 했겠지. 영화 보면 중국집 배달부도 스파이 역할을 하잖아.... 그래서 우리도 외부인들 출입을 최대한 막으려고 도시락을 싸 오거나 직접 사 와서 먹었다는 거 아냐. 난리도 아니었어. 요새 보면 우리가 영화보다 더한 세상을 살기도 하잖아. 정말....”
하하하. 호호호. 고팀장도 웃기는 상황에 손뼉까지 치며 크게 웃었다. 자신은 몇 시간 전에 더한 스펙터클 스토리를 듣고 와서 그런지 소변호사의 얘기는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들렸다.
“그래 너도 힘들었겠다. 경찰이나 정보기관 같은 데서 계속 감시하고 그러면 얼마나 신경 쓰이는데... 이번에 너희 시민연대에서 큰일 하나 하셨어. 다들 고생하셨네. 우리 사회에 이런 시민단체라도 있으니까 양심고백도 공익제보도 가능한 거잖아. 아무튼 누군가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거 같아. 이번 껀도 잘 해결돼서 정말 다행이야. 저번 공감이랑 했던 공감능력 관련 행사도 그렇고 이번 사안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소금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들을 위해서 기부도 많이 하고 그래야 할 것 같아... 친구야 그치?”
기부라는 말에 소변호사도 크게 환영했다. 이미 고팀장은 로펌에 있을 때부터 적잖은 금액을 여러 시민단체에 기부하는 열혈 민주시민이었다. 시민단체 일이라는 게 비영리활동이다 보니 모든 사업이나 활동에 돈이 필요했다. 국가보조금으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와 같아서 기부금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보조금은 그나마도 생색내기에 그치거나 지원을 중단하고 있었다. 저번 성과급 잔치에도 고팀장은 큰 금액을 기부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그렇잖아도 너랑 통화하면 그 얘길 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니네 회사 대표님이 우리 시민연대에 거액을 기부하셨어. 회사이름이 아닌 자신의 명의로 말이야. 많은 기업들이 기부하고 싶어도 정부 눈치 보느라 그러질 못하거든. 진보단체 지원한다고 괜히 책잡히면 안 되잖아. 근데 대표님이 그 얘기 너한테 안 했어. 저번에 공감능력 행사 다 끝나고 우리 시민연대에 연락하셨더라고. 기부할 방법을 알려달라고... 그래서 우리 활동가들이 깜짝 놀랄 금액을 후원해 주셨어. 거기 누구야... 기력토탈케어 정회장님도 그에 못지않게 기부하셨고. 꼭 두 분이 짜고 한 것처럼 그랬어. 최근 우리 시민연대 재정상황이 아주 풍요로워졌지. 행복해 죽을 지경이지. 하하하.”
고팀장은 소변호사의 얘기를 듣고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자신은 물론 생각나무의 누구에게도 눈치도 안 주고 그렇게 선한 행동을 하다니. 안대표가 다시 보였다. 그 예리한 눈빛과 단호한 입술까지도... 소변호사와 조만간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통화를 끝냈다. 한편으로는 용감한 군인 사건이 크게 증폭되지 않고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치유 테라피와 공감능력 테라피가 일으킨 반향 때문에 지원팀과 마케팅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 때문에 언론담당인 민수경 마케팅팀장의 한 달 스케줄이 꽉 차있었다. 수시로 브리핑룸과 회의실에서 공중파 TV나 언론사 기자들과 대면했다. 최근 언론에 노출된 횟수로 따지면 어느 대기업 못지않게 빈번했다. 생각나무의 이미지는 영리회사이면서도 사회적 공헌도가 가장 많은 회사로 알려졌다. 돈을 들여 별도로 광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여느 대기업처럼 자신들이 운영하는 재단을 만들지 않고도 진정한 사회봉사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었다. 대기업의 사회공헌 재단운용은 실질보다는 형식에 치중한 측면이 많았다. 출연재산이 그대로 대기업 내부에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형식적이고 보여주기식 사회공헌 활동이 많았다. 그마저도 기업 브랜드 이미지화에 동원되는 느낌이 강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방식이었다.
빈 스케줄없이 바쁜 민팀장이 갑자기 7층 법무팀을 찾았다. 뭔가 긴급한 사안이 있는 모양새였다. 법무팀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창가 쪽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고팀장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구석에 있는 휴게실 탁자에 가서 앉았다. 고팀장이 반갑게 먼저 말을 꺼냈다.
“어머, 언니... 아니 민팀장님, 요새 엄청 바쁘시던데 오늘은 조금 시간이 나셨네요. 하하하. 커피나 차 한 잔 드릴까요?”
민팀장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괜찮다고 했다. 가벼운 미소 속에는 기분 좋게 피로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니까요. 오늘만 벌써 커피를 세잔이나 마셨네요. 요새처럼 바쁜걸 좋다고 해야 될지 힘들다고 해야 될지 모르지만, 정신없이 보내기는 했죠. 최근 며칠은 광고회사 다닐 때보다 더 바쁘게 움직이는데. 호호호...”
“그래 보였어요. 개발팀도 그렇지만 마케팅팀도 인원 충원을 해야 한다고 그러던데요. 지원팀장님께서요. 민팀장님하고 직원들이 언론 담당까지 하셔서 너무 힘드시다고...”
“그렇잖아도 어제 지원팀에서 필요한 인원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고 해서 우리 입장을 전달했거든요. 아마 두세 명 정도 새로 뽑을 예정인가 봐요. 개발팀도 연구 인력을 대여섯 명 정도 요구를 했고요. 지원팀에서 이번 주에 공고도 낼 예정이래요...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 우리 회사 인기가 엄청 좋은 거 아세요. 기자들이 선정한 한국에서 근무하기 좋은 10대 회사에 포함되었잖아요. 급여와 후생복지, 회사의 장래성과 조직문화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거 같아요. 설립한 지 2년도 안된 회사가 삼성은 물론 구글 코리아나 네이버보다 앞선 걸 보면 기자들도 우리 회사가 부럽긴 한가 봐요. 호호호.”
민팀장의 웃음에 고팀장도 손뼉을 치면서 동의했다. 눈치 빠른 법무팀 막내가 구내 카페에서 새콤달콤한 석류차 두 잔과 간식거리를 가져주었다. 고팀장은 막내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고개를 돌려 민팀장에게 차를 권했다. 두 사람은 나이가 10년 이상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스스럼없이 잘 지냈다. 고팀장은 사석에서는 민팀장을 언니라고 불렀다.
“야! 이 붉은 루비색 보세요. 어쩜 이렇게 색깔이 이쁠 수가 있죠. 이 알갱이들은 무슨 보석 같아요. 석류차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우리 팀 막내가 이렇게 속이 깊답니다. 여성들에게 좋다는 석류차를 가져오고. 호호호. ”
민팀장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석류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서는 작은 탄성을 자아냈다. 새콤한 첫맛과 달콤한 끝맛이 미각을 완전히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밖의 카페에서는 보기 힘든 진짜배기 석류알도 여러 개 들어있었다.
“고팀장님, 혹시 마인드컨트롤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마인드컨트롤 코리아 주식회사라고...”
고팀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처음 듣는다는 듯 말했다.
“아뇨. 일반적 의미로 마인드 컨트롤은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조절하는 거잖아요. 자기계발서 단골이잖아요. 마인드 컨트롤. 근데 이 회사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꼭 느낌이 꼭 미국계 정보산업이나 무슨 심리조절 관련 회사 같은데요....”
“맞아요. 미국에서 들어온 회사가... 오늘 오전에 기자들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 한 사람이 최근 이 회사가 내세우는 상품과 전략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묻길래... 처음 듣는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그 기자가 자신이 몇 주째 기획기사를 고민하고 있다면서, 그 주제가 ‘디지털정보환경에서의 조직문화의 변화 탐색’이라는 거예요. 이 회사 얘기를 하면서 나한테 그 회사를 아느냐고 물어서 한번 검색기를 돌려서 알아봤거든요...”
여기까지 말하고는 민팀장은 다시 석류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신맛이 자극적인지 작은 몸서리와 눈웃음까지 보여주었다. 고팀장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민팀장의 대화기술에 안 날이 나서 급히 눈총을 쏘았다. 언니 빨리 말하시라고요.... 그래서요.
“그런데, 이 마인드컨트롤이라는 회사가 미국에서는 이미 여러 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미국 국방부하고 여러 공공기관, 그리고 직원들 통제가 필요한 기업들에서... 근데 이 회사 프로그램 이용료가 되게 비싸요. 그만큼 독점적이거나 희귀하다는 얘기거든요. 별도의 마케팅 없이 직접 접촉으로 고객과 연결되는가 봐요. 궁금해서 개발팀의 AI 연구원인 박형철 씨한테 물어봤더니... 그쪽 업계에서는 꽤나 유명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기자는 왜 팀장님한테 그 회사를 물어보셨대요? 자기가 알아보고 기사를 쓰면 될 텐데요.”
“그 회사가 최근에 한국시장에 진출해서 지금 클라이언트를 모집하고 있나 봐요. 그게 기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서, 알아봤더니 우리 회사랑 비슷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사용해서 혹시나 알지 않을까 해서 물어봤데요.”
“아, 그런 내막이 있었네요. 정보기술 트렌드가 비슷하게 쓰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금 유행하는 챗GPT도 여러 업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내놓고 있잖아요. 우리 같은 방식으로 사업을 꾸리는 회사도 있기는 할 것 같은데.... 음... 그런데 그 회사 이름 자체가 걸리긴 하네요. 마인드 컨트롤... 사람의 생각을 조절한다. 뭐 그런 거 아닐까요?”
“박연구원님 얘기가 이 회사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서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가 봐요.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여러 인권단체에서 인권유린을 위한 도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반발이 심하다고 그러던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상황이라서 뜻밖이네요. 유럽 쪽에서도 이 회사가 진출했을 때 여러 나라에서 그런 논란이 있었다고 그러네요. 우리가 그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거 같기는 해요....”
고팀장은 컵에 남은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며 새콤달콤한 맛을 눈으로 표현했다.
“언니, 아니 팀장님. 그러고 보니 안대표님이 이 회사를 알고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AI전문가들이 한정되어 있어서... 박 연구원님이 알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거 같아요. 안대표님 방으로 같이 한번 가보실까요?”
두 사람이 지원팀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안대표의 방에 들어섰을 때 안대표와 개발팀장이 대화 중에 있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고팀장이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머, 대표님과 팀장님은 저희가 이방에 올 줄 아셨나 봐요. 우리 회사 제품 중에 타인의 마음 읽기 테라피도 있나 보네요. 하하하.”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던 안대표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발팀장님도 아마 똑같은 주제 때문에 올라오신 거 같아서... 두 분을 기다리고 있었죠. 박형철 연구원님이 저한테도 사내메일을 보내서 조금 살펴봤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에 대해서.... 그래서 급히 개발팀장님이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죠.”
민팀장과 고팀장은 얼굴을 마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민팀장이 기자의 질문에서 시작된 스토리를 간략히 말하고는 다시 안대표를 응시했다. 안대표는 자신이 짧게 검토한 결과를 얘기했다.
“여기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개인용과 기업용 프로그램이 나와 있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개인프로그램들은 아마도 사전적 의미의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한 셀프컨트롤 프로그램일 겁니다. 그런데 기업용은 예측하기 쉽지 않으나 조직을 위해 개인을 통제하거나 조정하는 툴(tool)이 깔려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고팀장이 깜짝 놀라며 빠르게 반응했다.
“아니 지금 이런 세상에 그런 프로그램이 가능해요? 에이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아니죠. 그런데... 음, 그렇지만 우리 회사를 보면 생각의 원천이나 이런 정보화기술이 쭈욱 발전하다 보면 별 이상한 것도 다 가능할 거 같기는 한데.... 그러고 보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고팀장의 오락가락 화법은 옆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제 결론이 뭘까요.” 하면서 혼자서 낄낄낄. 하하하.... 안대표도 고팀장의 반전매력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엄청 냉철해 보이면서도 지금처럼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이게 털털한 고민정만의 매력인가? 왁자지껄한 웃음이 잦아들자 안대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정보산업 수준으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거는 다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사회적인 규제나 윤리적 문제 때문에 자제해서 그렇지. 우리도 그렇지만, 이런 마인드 컨트롤 회사 같은 사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죠. 아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그런 사업들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느끼고 있지만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엄청 매혹적이잖아요. 그게 돈이 되던 안 되든 간에...”
재기 발랄한 개발팀장도 안대표의 설명에 슬며시 숟가락 하나를 얹었다.
“우리 회사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씨앗은 사실 전혀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저런 통제나 조정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거든요. 문제는 현실적인 제약과 시간이죠. 일정하게 축적되는 정보량 하고.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얘기 아시잖아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도 그렇거든요. 처음에는 작은 자극이나 정보에 반응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 양을 조금씩 늘려주다 보면 거기에 무감각해지면서 중독되거든요. 조금 어렵게 말한다면 역치값이 계속 올라가는 거죠. 우리가 인터넷 쇼핑할 때나 유튜브 볼 때 포탈에서 뭔가를 한번 클릭하거나 조회하면 그 정보 관련 이슈들이 계속 올라오잖아요. 근데 이거는 이쪽 업계에서는 아주 원시적인 기술에 불과하거든요.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냥 개인 클릭에 따른 관심사를 사고파는 거에 불과하거든요. 지금 대중화된 이 시스템이 이미 10여 년 전에 나와서 누군가는 돈을 벌고 있었죠. 이런 시스템을 점증적으로 고도화하다 보면 개인의 관심사나 욕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컨트롤할 수 있는 설계도 가능합니다. 지금도 얼마든지요.”
개발팀장의 얘기에 고팀장과 민팀장은 ‘헉’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안대표가 똑똑한 개발팀장을 칭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부연설명을 했다.
“실제 우리 개발팀장님이 얘기한 메커니즘이 인간의 심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거든요. 호기심이 집중과 습관으로 변화된다는 순서를 따른다는 것을 알고 이런 방식으로 인간의 심리를 길들이는 거죠.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심리학적으로는 가스라이팅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예를 들어, 첫째로 개별화된 필터를 사용해서 개인이 좋아하는 정보를 알아낸다. 둘째는 그 개인의 관심사가 집중되도록 맞춤형 정보를 계속 주입한다. 셋째는 그 제공된 정보가 개인에게 유익한 하나의 세상을 구축하도록 한다. 넷째는 그 개인은 외부세계의 변화에 무신경하게 되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다.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그 개인은 정보제공자가 원하는 대로 지배당하거나 통제당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민팀장과 고팀장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할 말을 잊었다. 이어지는 개발팀장의 이 한마디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침묵의 시간을 제공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개인은 새로운 정보를 만날 수 있는 선택의 기회와 개별적 호기심이 사라지게 되는 거죠. 경마장에 있는 경주마가 이런 식으로 통제당하잖아요. 다른 쪽을 쳐다볼 수 없게 눈을 가리고 오직 기수의 신호에 의해서 앞으로만 갈 수밖에 없죠. 결국 이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을 만든 누군가가 결국 원하는 대로 그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 이거죠. 하하하”
고팀장은 똑똑한 두 사람이 말해주는 논리적인 설명으로 통제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게 가능한 기술이고, 얼마든지 현실에 적용 가능한 기술이고, 개인을 통제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집단에서는 사용가능한 기술이네... 헐. 과연 마인드 컨트롤인가 하는 회사는 이런 식의 정보화기술을 파는 걸까? 하는 의문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경마장의 경주마와 같은 신세의 개인들이라.... 음.
그동안 법조문과 판례사이에서 틀에 박힌 논리구조로 싸우는 법정이나 계약서를 보다가 이렇게 예상할 수 없는 큰 세상을 보니 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예상하기 힘든 경쟁의 소용돌이 같은 세상이지만, 누군가 앞서는 이들에게는 계속 자기들만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고팀장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핏속에 그런 개척자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콩당 콩당 가슴이 계속 뛰고 있었다. 오늘따라 선정릉 위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