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내비게이션의 시대다. 5만 분의 1 축적 지도를 점점이 좇던 시선들이 시각과 음성의 복합체인 내비게이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종이지도에서 한 점의 좌표는 다른 여러 점의 좌표와 상관성을 갖는다. 그 상관성은 좌표 간의 의미가 거리가 될 수 있었고, 나침반과 같은 방향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때로는 수평적인 종이 좌표에서 입체적이고 공감각적인 판단도 가능하게 했었다.
현재의 내비게이션은 방향을 제시하지 않고 이용주체가 나아가는 현재의 동적인 위치를 알려줄 뿐이다. 등대가 항로를 따르는 배의 위치를 가늠하게 하여 스스로 나아갈 길을 찾아가게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내비게이션을 믿고 따르더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은 스스로 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위를 바라보면, 스스로 나아갈 바를 정하지 못해 방향을 잃고 길을 헤매는 이들이 많다.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의 섬이다(아니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인간은 서로에게 누구의 방향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설사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아 방향성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양 좌표 간의 수평적 의미를 해석하는 몫에 한정된다. 그래서 타자로부터 오는 가르침은 늘 어렵고, 그 깨달음은 늦을 수밖에 없다. 하여, 참다운 선생은 태어나기도 완성되기도 어려운 것이다. 오늘날은 선생 부재의 시대이다.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위치를 파악하고 자신의 방향성을 자발적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성은 스스로의 생각에서 발원한다. 생각의 근원은 다양한 경험과 독서활동과 유익한 대화에서 비롯된다. 결국 오늘 나의 삶의 방향은 현재까지 이르는 체험적 과거의 총체이자 축적된 시간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위하는 삶이 나만을 위한 삶이 될 수는 없다. 내 존재가 가족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바가 필요할 것이다. 내 생각에서 비롯된 바람직한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은 가족과 주변이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을 오월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고 청보리밭처럼 살아있게 하는 것도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법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좀 더 구체적인 내 삶의 한계와 기대치를 만들고 나만의 법칙을 창조하는 사색과 발효의 시간이 필요하다. 더불어 세상이라는 거대한 숲에 관한 통찰과 아이의 미소에 답할 줄 아는 작은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자신이 만든 나침반으로 나만의 길을 찾고 나와 타인에게 진정 의미 있는 이정표를 만들 때 나는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