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내가 나중에 크면 모든 자동차를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로 바꿀 거야. 그리고 모든 집에 태양열 발전장치를 지붕에 만들어서 전기도 만들고....”
아빠가 묻는다.(속으로는 의문을 가득 안고)
“왜 하이브리드고, 왜 태양열 장치야....”
아들이 대답한다.
“응, 책을 보니까 화석연료 때문에 오존층이 파괴되고,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저지대의 국가들이 물에 잠긴데. 엄마, 아빠 신혼여행 갔던 몰디브도 2050년에 물에 잠긴다는데”
아빠는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던가? 같이 논길을 걷고, 리어카를 밀었던 기억은 있는데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아들이 묻는다.
“아빠, 와인하고 코냑은 어떻게 달라”
아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집에 있는 와인 책을 보았군.... 쩝쩝
“응, 와인은 네가 알다시피(?) 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고, 브랜디(코냑도 브랜디의 일종)는 그런 과실주를 끓이고 증류해서 만든 거야”라고 아빠가 답했다.
호기심 많은 나이의 아들은 별걸 다 묻는다. “대통령은 어떻게 뽑는 거야? 앙코르와트는 어디에 있어? 지하철 한 칸은 얼마 정도 할까? 아빠 꿈은 뭐야? 미국과 북한은 왜 사이가 나빠? 잠잘 때 꿈은 왜 꾸는 걸까? 포경수술은 꼭 해야 돼?....” 일일이 대답하기에 골치 아프다.
부모는 아이들의 보물창고가 되어야 하고, 고물 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요새 아이들은 공부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을 읽고 수많은 정보를 얻는다. 분명한 것은 부모들이 책을 읽지 않거나 정보수집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아이들에게 책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거침없는 한마디. "아빠는, 엄마는 그것도 몰라"
어느 날인가 부엌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전후 사정은 그랬다. 큰딸이 엄마에게 사회 관련 용어가 이해가 안 되어 물었더니, 엄마가 엉뚱한 얘기를 하더란 거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엄마는 평소에는 가지지도 않은 자존심을 (쪽)팔렸고, 아이는 엄마한테 다시 물어볼만한 신뢰성을 잃었다. 이러한 등가교환은 중요한 결론을 가져왔다. 다시는 큰딸이 엄마한테 공부 관련해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짐이 아빠에게로 넘어왔다. 적지 않은 공부를 하고 상식이 풍부하다고 자처(?)하는 아빠지만 부담스럽다. 조만간 자존심을 팽개칠 위기의 순간이 올 것 같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오늘도 내가 알던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아이들의 머리가 커갈수록(동시에 부모의 근심도 커가고) 부모의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3.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아빠랑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던 큰 딸이 중학생이 되더니 손은 고사하고 멀리 떨어져 걷는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런 질문을 해대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꼭 필요한 말을 빼고는 묻는 법이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최근 우리 큰딸 같은 아이들에게 “중2”라는 사회적 신분을 부여했다. 심지어 “중2병”(중학교 2학년의 심리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 실체가 있다는 연구 보고도 있고, 북한의 김정은이 방위병과 함께 중2를 무서워한다는 소문도 있다. 외계인이 중2 때문에 지구 침공을 못한다는 믿지 못할 말들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어찌 되었건, 중2병을 앓고 있는 큰딸과의 대화는 어렵다. 아! 이런...
아빠 입장에서도 어찌어찌해서 다정하게 말이라도 붙여볼라치면 싸늘하고 가시 돋친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혼자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기 일쑤다. 우리 큰애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기는 한데, 사춘기라 부르는 이 시기를 지혜롭게 잘 지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누구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부모 스스로가 애걸복걸할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여러 경계를 지나 우리를 만들었듯이, 또 다른 시간이 우리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드는 발효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의 눈빛은 분명 저항의, 이유 없는 분노의 그것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엄마 아빠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말을 그냥 들어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맥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편하게 아이를 받아들여줄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부모에 대한 응석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 부모는 또 다른 성장기(혹은 갱년기)를 지난다.
#4.
저녁밥상에서 여러 설전으로 인해 밥알이 포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밥상머리의 기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 집은 일주일 중 네다섯 번은 가족들 모두가 6인 상에 둘러앉아 조촐한 저녁을 맞는다. 아름다운 밥상을 예상하거나 둘러앉은 의도는 거창한데, 밥상은 늘 시끄럽고 어쩔 때는 말다툼으로 끝을 보고야 만다. 애들끼리, 부모끼리, 부모와 애들 간에 사소한 입씨름이 어느덧 반찬처럼 놓여있다.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데 가까이서 보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애들 눈치(?) 보면서 서로 간의 대화를 끊이지 않게 하는 게 의미 있었다. 아이들이 오늘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의 쏟아낸 말속에는 하루를 지탱해온 감정의 농도나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때문에 부모들에게는 그 몇 마디가 지니는 행간의 의미까지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내뱉는 말이 사실적이면서도 거칠더라도 그 속에 아이들의 진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부모는 그 말의 형식이나 품격을 고려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의도와 내용에 주목하여야 하여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보기에 많은 것들이 서투른 아이들에 대해, 성인의 기준으로 말의 형식을 재단하고 그 내용의 격을 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당장은 십 대의 잦은 욕설이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옛날 거친 욕을 해대던 지금의 부모들도 그 십 대를 거쳐서 완성되지 않았던가. 우리 또한 우리의 부모들을 분노케 했던 한때의 철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