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에서 4년 동안 회사 주재원을 했던 친구가 하마터면 고소당할뻔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오스트리아 현지 법인의 보스였기 때문에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현지 직원과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보스인 친구: Hi, Peter. Shall we have a drink tonight?(오늘 저녁 술이나 한잔 할까요?)
부하인 직원: Boss, I don't know what you mean.(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여유 있는 친구: (능글맞게 생글거리며, 여유까지 보이며) Let's have a drink tonight. "번개" in korean.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한국말로 "번개"라고.)
의아한 직원: "벙개"(고개를 갸우뚱거리며) No, I can't drink with you in the evening.(손사래까지 치며)(아니요, 저는 저녁에 보스와 같이 술을 마실수 없습니다.)
열 받는 친구: Why don't you have time tonight?(왜 오늘 저녁에 시간이 없나요?)
거부하는 직원: It's not that I don't have time. I can't drink like that.(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런 술자리는 못합니다.)
화난 친구:(뭐 이런 부하직원이 다 있지라는 표정으로) Why can't you drink?(화난 듯. 또박또박한 투로.)( 왜 안 마신다는 거죠?)
단호한 직원: We don't drink unscheduled drinks.(우리는 예정에 없는 술을 안 마십니다.)
그 뒤로 약간의 대화가 더 있으나 생략... 얘기의 결론은.
친절한 직원: In Austria, you must promise in advance to drink. a few weeks ago(보스를 불쌍히 여기면서 설명하는 투로.) (오스트리아에서는 술을 마시려면 반드시 미리 약속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몇 주 전에.)
화에서 풀려난 친구: (납득은 안 가지만 억지로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Okay, Peter, I almost made a big mistake. I'm sorry.(오케이 피터. 내가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네. 미안하네.)
한마디 더하는 직원: We consult with our family in advance when we make a promise to drink.(우리는 술 약속을 할 때 가족과 미리 협의를 합니다.) Because family time is the most important thing.(가족과의 시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죠)
현실을 인식하는 친구: I see. If it's in this culture, I should know.(그렇군요. 그게 이쪽 문화라면 내가 알고 있어야 되겠군요.)
쐐기를 박는 직원: If you ask for an unfair drinking promise, you may be sued.(만약 상사가 부당한 술 약속을 강요하면, 고소당할 수도 있습니다.)
깜짝 놀란 친구: Okay. I'll get it.(깜짝 놀란 듯이 두 손을 벌리며)(오케이. 잘 알겠습니다.)
치킨의 달콤함엔 세대차이가 없다. 성인들에게는 시원한 생맥주까지 덤으로...
술자리 강요는 고소당할 수도 있다.
친구는 자신이 현지 법인의 장(長)으로서 같이 일하는 오스트리아 직원에게 저녁 번개를 제안했다가 퇴짜는 물론 근로자 관련 법률에 의해 고소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와는 너무 다른 조직문화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지만 입맛이 썼다고 한다. 다행히 그 직원이 이런저런 얘기를 해줘서 그다음부터는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사법제도를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기회였을텐데.
우리 사회 같으면 상사가 제안하는 저녁 번개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오죽하면 "본인상" 빼고는 거부할 사유가 없다는 얘기가 농담 반 진담 반 떠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저녁 번개 모임은 술자리를 즐기는 주당들부터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이들까지 하나의 복음서와 같다. 삶의 활력을 "번개"에서 찾는다는 소모임(00 번개 정모)도 많다. 오후 5시가 넘으면 습관적으로 전화를 기다리는 이들의 눈빛은 그 자체로 술 고픔이다.
아무튼, 그쪽 사람들은 야근과 회식은 거의 없고 동료와의 번개모임도 없다고 한다. 누군가와 술자리 약속은 2~3주 정도 전에 각자의 가족과 협의를 한 다음 미리 일자를 정한다고 한다. 퇴근 후에 가족들과 하이킹과 산책과 집 근처에서 각자의 레저활동을 즐긴다고 한다. 술도 나와서 마시는 것보다는 집에서 가족끼리 간단히 와인이나 맥주로 해결한다고 한다.
친구가 한국에서 20여 년 넘게 직장 생활하는 동안 즐겨왔던 번개모임이 진짜 번개처럼 사라지니 공허함이 찾아왔다고 한다. 친구들의 달콤한 번개의 유혹에 넘실대는 맥주잔과 기름진 안주가 주는 행복의 순간을 몸이 기억하고 있을 터인데. 아무튼, 번개가 주는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지다 보니 그 친구는 외국생활 초기에 우울증이 생길뻔했다고 한다. 가족과는 서먹서먹했고. 저녁 내내 얼굴을 대하고 있으니.
폭탄주는 스트레스를 날려준다는 전설이 ㆍㆍ
한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에 술과 고기에 맥주에 치킨을 들이부었기 때문에 마음은 흡족했을지 몰라도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거기에 온갖 술자리의 훈장으로 고지혈증과 고혈압까지 얻을 수 있었다. 덤으로 넉넉한 허릿살까지.
오스트리아 생활이 계속될수록 친구의 몸과 마음은 가벼워졌다. 조금 지나면서 야근과 번개모임이 없는 고요한 저녁이 찾아왔고, 덕분에 그 친구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얘기하고 산책을 즐겼다. 현지인들과 거의 같은 생활리듬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느슨한 생활이 주는 여유와 시간의 빈 공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의 비엔나 생활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고 한다. 덕분에 가족과 집에서 맛있는 유럽 맥주를 원 없이 마셨다고 한다. 부부 사이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좋아졌는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가 다시 귀국을 했다. 그토록 그리던 번개모임이 그 친구를 위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친구는 이번에는 저녁 번개 때문에 다시 우울 모드를 접신할 뻔했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을 4년 동안 체험하고 있다가 다시 저녁을 박탈당한 사회에 복귀했으니 그럴 수밖에. 오스트리아에서 묵언수행을 했던 핸드폰이 이제는 오후 5시가 넘어가면 다시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친구의 몸과 마음이 예전의 추억을 소환하기를 거부했다.
친구가 해결책으로 내놓은 하나의 방법
스마트폰과 일정한 거리두기(번개를 정중하게 거절하기)
친구는 기억한다. 회사의 잦은 회식이나 저녁 번개가 없어도 인간관계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4년 동안의 알토란 같은 기억을.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던 시간들. 그 순간 보였던 수많은 밤하늘의 별과 아이들의 눈동자를. 무엇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반기는 아내까지. 친구는 그 소중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제는 "부재중 전화 몇 건"의 흔적을 가진 스마트폰으로 독서를 하며 집으로 향한다. 덕분에 친구들과 지인들은 배신감에 술자리 안주가 별도로 필요 없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친구는 이제 우울과 담을 쌓고 가족들과 남다른 정을 새록새록 쌓아가는 중이다. 그것도 한국에서.
여기까지는 친구의 얘기다. 오스트리아를 가보지 못한 우리는 오늘도 저녁 번개에서 색다른 에너지를 얻고, 집에서는 그만큼의 욕을 먹는다. 어찌 되었건 이래저래 배는 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