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티아고
어젯밤에 도착한 마을의 알베르게에는 순례자가 없었다. 그래서 순례길에서 복권 당첨과도 같은 행운이라 불리는 개인 욕실이 있는 독방을 배정받았다. 그동안 코골이, 공용욕실, 남녀공용 2층 침대에 지쳐 있던 터라 하루 정도 돈을 더 내고 호스텔로 갈까 고민했었는데 알베르게 가격에 호스텔과 같은 곳에 묵는 호사를 누렸다. 아침에 길을 나서는데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어제 힘들게 걸었음에도 발걸음이 가볍다. 걸으며 카미노의 기적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난 24일 간 도와주었고 지켜주었던 친구들이 기억이 난다. 에드리안, 매튜, 타일러, 루이지, 스테판, 그렉, 호세, 페페, 에스트레아... 그래서 지금 혼자 걷고 있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한국에서 찰스가 보내준 노래를 흥얼거린다. '더불어 함께 이 길을 가네.. 혼자선 가지 못할 이 길을 가네...' 그래서 한국에 있는 찰스도 지금 나와 같이 걷고 있다.
16km쯤 걷는데 언덕이 나온다. 언덕 위에 하트 모양이 잔뜩 박혀있는 노점상 하나가 나온다. 순례자들에게 기부제로 돈을 받고 음료, 과일, 빵 등을 제공하는 우리와 같은 순례자 데이비드가 그 곳에 있었다. 데이비드는 작은 노점상 옆에서 텐트를 치고 그 곳에 살며 순례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3년 전 이 곳에 노점을 차리기로 결정하고 순례자들과 가볍게 그리고 깊은 대화들을 나누며 자신만의 순례길을 걷고 있는 데이비드의 자기 안에서의 자유로움, 자기에 대한 믿음과 소신,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멋져 보였다. 데이비드 역시 힘든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것에서 의미를 찾고 다시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기만의 행복을 찾아서...
데이비드의 노점상에서 산티아고부터 거꾸로 순례를 하고 있는 미국인 쉐리와 프랑스인 장피드를 만났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암묵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만난 프랑스인들은 기가 죽는다. 나 역시 순례길 초에 헬리콥터 사건으로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에 왠지 프랑스인 장피드가 측은해졌다. 우리는 결국, 각 나라마다 장점도 있지만 또 단점도 있다며 그게 정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냥 그게 우리 인간이다. 그리고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이 곳에서 충분히 경험하면서 우리들은 그렇게 다를 것도 없는 같은 신의 자녀이리라. 쉐리와 나는 각자 반대로 길을 가고 있으며, 만난 지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금세 가까워졌다. 쉐리와 나는 우리가 원래 알던 사람들 같다고 신기해했다.
떼제에서 만났던 미리앵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나와 쉐리는 이 길 위에서 서로를 향한 마음이 활짝 열렸었던 것 같다. 쉐리를 내가 걸어온 길로 떠나보내며 나는 오늘 아침 생각한 순례길의 기적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지했다. 인생의 기적이 사람인 것처럼... 쉐리는 혼자 걷는 길에 조심하라고, 충분히 강하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순례길 후에 나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메일 주소를 주고 장피르와 함께 아쉽게 떠났다.
누군가를 다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슬펐지만, 이미 친구들을 모두 떠나 보낸 나에게 이렇게 하루 만에 좋은 친구를 보내주신 걸 보면 결국 떠나고 헤어진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와 작별인사를 했다. 데이비드는 지난 기억들에 힘들어하고 있는 나에게 그 기억들은 상처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고 그 행복을 나의 마음속 유리병에 넣고 꼭 닫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눈물이 났다. 한 약한 인간이... 나와 다른 약한 인간인 데이비드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담은 긴 포옹을 나눴고 나는 그 시간 동안 데이비드가 아무 말없이 자신의 에너지를 담아주는 것을 느꼈다.
바로셀로나 집을 떠나 순례길의 언덕, 혼자 허름한 텐트에서 살고 있는 데이비드는 이것이 자기가 선택한 현실이라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선택한 현실의 행복을 자신의 마음속 유리병에 담는다고 말했다. 나는 지난 모든 시간 동안 함께해주었던 이들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지금 혼자 있게 해 준 것도 고마웠다. 어제 실수로 33km를 걸은 것도 고마웠다. 그 덕분에 나는 내일, 우연히 부활절 크루즈 데 페로(십자가 언덕)를 건너러 간다. 나는 내일 십자가 언덕에 다른 이들처럼 나의 짐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25일 간 기다려온 그 곳을 부활절에 넘게 되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감동적이지 않은가.
총 : 19.9 유로
1. 알베르게 5.0
2. 점심 및 간식 10.9
3. 저녁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