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10대 시절부터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생활했다. 그렇다 보니 서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소위 그 시절에 서울에서 공부하는 엘리트였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언급했다. 아버지 덕분에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 소재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들었다. 그 후 어머니와 중매로 결혼하고 1년 후 내가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구두는 늘 반짝반짝 빛났다. 어머니가 손질한 양복과 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를 배웅할 때 마지막에 보이는 것이 구두였다. 시간이 오래되어 다른 기억은 희미하지만, 아버지의 구두 만큼은 선명하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멋진 양복과 빛나는 구두를 신고 싶은 꿈이 생겼다.
* 1997년 그 날 이후
1997년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고3 입시에서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없이 놀았다. 20살이 되어 처음 느껴보는 그 자유가 너무 좋았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추워지는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그 날도 친구, 선배들과 술 한잔 먹고 늦게 집에 들어오던 날이다.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는 일찍 자는 중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냥 집에 무슨 일이 있구나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방에 들어가는 도중 현관에 있던 아버지의 구두를 우연히 보았다. 뒷굽이 다 닳은 낡고 더러운 구두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과 낡은 구두가 그 날따라 왜 그리 내 마음을 울렸는지 그때는 몰랐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그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오래된 구두를 버렸다. 일을 하러 가신다고 아침에 나가시는데, 옷차림이 바뀌었다. 양복이 아니라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오래된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가 퇴근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한참 표정이 좋지 않다가 어렵게 말을 꺼낸다. IMF 사태가 터진 그 시점이다. 그랬다. 아버지도 20년 가까이 다니던 대기업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 때 아버지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가족을 위해 아파트 경비, 공장 등으로 옮기면서 돈을 벌었다. 여전히 철이 없던 나는 아버지에게 왜 이리 용돈이 적냐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 오랜만에 본 아버지의 구두
72세가 된 아버지는 여전히 일을 한다. 내 나이만큼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45년이란 그 세월을 아침에 출근하고 일을 한 후 퇴근을 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아버지의 꾸준함이 참 위대해 보였다. 몇 달 전 본가에 가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돌아온 아버지는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릴 적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다. 아마 다른 가족들은 모를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이렇게 사람 구실 하면서 살고 있다. 45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 느끼게 되었다. 얼마나 긴 시간을 혼자서 외롭게 견디면서 살아오셨을까? 여전히 아버지에게 잘 못 해드리고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 이 불효자 곁에서 오래오래 계셨으면 좋겠다. 아버지에게 구두 한 켤레 사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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