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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

by 황상열

“재수 하라고! 한번 더 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어!”

“안해요. 저는 1년 동안 더 공부하기 싫어요.”

“왜 말을 안 듣냐! 1년 더 대학에 늦게 간다고 니 인생 안 망가진다.”

“아버지. 저는 하기 싫어요. 그냥 점수에 맞추어 갈게요.”


1996년 12월 대학수학능력시험 결과가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1년 동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결과를 본 아버지는 나에게 재수를 권했다. 그러나 똑같은 공부를 1년 더 하기 싫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그러면 안되는데 계속 대들었다.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대꾸했다. 자식이 더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버지도 말씀하신 건데 그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표현 방식의 문제였다. 아버지도 자꾸 화를 내면서 다그쳤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나도 속상했다. 내 마음도 좀 알아주길 바랐지만, 오로지 명문대에 가야 한다고 외치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아마 그 시절부터 내 안의 분노가 쌓여서 갑자기 욱하는 성격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내 마음속은 이미 상처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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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 안의 화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 나에 대한 부당한 이야기를 듣거나 관계없는 일을 시키면 나도 모르게 욱하는 버릇이 튀어나왔다.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생각없이 말을 함부로 내뱉었다. 그렇다 보니 듣는 상대방은 황당하거나 혹은 당황할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 버릇이 가끔 나오다 보니 구설수에 오르거나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며칠 전 도서관에 들러 감정에 대한 책을 몇 권 빌려서 읽게 되었다. 어떤 한 책에서 성인이 되어 화를 잘 못 참는 사람은 한번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라고 나와 있었다. 이제 막 20살이 되기 직전의 내가 떠올랐다.

매일 아버지에게 재수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다. 또 아버지와 마주하면 서로 안 좋은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 얼굴만 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또 내 안에 커다란 상처가 생길 게 뻔해서 친한 친구 집에서 밤늦게까지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나와 비슷한 40대 중반이었다.


놀이터에 한 학생이 서 있다. 그네에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다. 그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되어 있다. 아마 또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한숨을 쉬고 있는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다.

“많이 힘들었구나.”

“누구시죠?”

“이제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 너무 힘들어 하지마. 다 잘될거야.”


40대 중반의 내가 19살의 나를 끌어안았다. 19살의 나는 그 품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40대 중반의 나를 보고 방긋 웃어본다.


상처받고 힘든 순간에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지금 혹시 내 안의 화가 많은 사람이라면 과거의 나를 만나서 보듬어주자. 지금 인생이 힘든 사람이라면 잠시 멈추고 나 자신을 토닥여주자.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외롭지 않도록 나 자신이 계속 말을 걸고 내 편이 되어 주자. 나의 따뜻한 시선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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