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를 걷다.
여행보다는 사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가능한 한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러야 하고, 두 번 이상 가봐야 하며, 웬만하면 하룻밤이라도 자야 직성이 풀린다. 몇 년 전부터 이런 스타일의 여행이 보편화되고 있는데, 뭐랄까 오랫동안 숨겨왔던 보물을 들킨 기분(?)이긴 하다. (그때쯤 나의 여행은 끊어지긴 했지만...)
해외로 가는 경우는 그래도 최소한의 일정을 짜 놓긴 한다. 하지만 어딜 가든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하는 일은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일이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볼 것 없다. 그저 사람이 사는 평범한 집들과 사람들, 조그마한 가게들... 그뿐이다. 번화한 도시라면 가게가 좀 많고, 한가한 지역이면 그나마도 드문드문이다. 한두 번 들르면 금방 단골이 되고, 나처럼 붙임성 없는 사람도 금방 눈 마주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동네를 어슬렁 거리다 보면 아무것도 볼 게 없는 곳에서 무언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이 좋다. 여행은 꼭 무언가를 봐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전주(행정 구역상 전주는 틀림없지만... 외곽이다.)에 있다. 한 달 정도 일 때문에 왔다.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금요일 저녁이면 다시 서울로 올라 가지만, 나는 특별히 서울에 가도 다를 바 없어서 그냥 남아서 동네를 어슬렁 거린다. 낯설다. 버스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가보기도 하고, 거리를 가늠하지 못해서 몇 정거장 거리를 걷기도 한다. 시내에서는 골목골목을 두리번거리다 길을 잃은 것처럼 왔던 곳을 맴돌기도 한다.
허허벌판의 한가운데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 펼쳐진다.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험은 그리 자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드문드문 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도 보이고, 사람이 들 것 같지 않은 곳에 열려 있는 식당도 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빈 정류장에도 시간이 되면 하나둘씩 사람들이 모여든다.
일요일 오후의 시내 풍경을 본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휴일의 시장은 멈춰있는 듯하지만, 드문드문 작은 움직임이 있다. 작년 같으면 비어있는 듯한 도시를 보면서 서글픈 기분이 들었을 텐데, 다시 보니 그런 감정보다는 그냥 글자 그대로의 '정중동' 상태다. 전주는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시가와 신시가로 구분된 것 같다. 일요일의 구시가는 마치 잠시 역사책의 사진처럼 멈춘 것 같다. 왠지 그게 재미있어, 앞으로 남은 몇 주 동안 내내 시내를 헤맬 것 같다.
처음에는 어디를 가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작년에 한번 머물렀던 경험이 있어서) 어디를 가야 하나? 고민했다가도 막상 한번 발걸음을 떼고 무작정 걸어보니 점점 재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차를 타고 바라보던 풍경이 가깝게 다가오니 비로소 드문드문 보던 길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그제야 머리 속에 이미지가 생기기 시작한다. 전주는 이런 도시구나. 광고에서 보이는 맛과 멋이 아니라, 이 곳에 터를 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의 냄새, 감정이 보인다. 다를 것 없는 풍경 속에 뭔가 다른 느낌. 그러다 보면 짧은 시간이라도 그 나름의 애정이 생겨 난다.
남부 시장 내의 청년몰에서 혼자 늦은 점심을 먹는데, 다른 커플이 옆 테이블에 있었다. 그들이 주인에게 묻는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 근처에 가볼만한 데가 있어요?"
슬쩍 보니 둘이서 열심히 휴대폰으로 검색을 한다.
만약 나에게 물었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냥 발길 닿는 데로 걸어 보세요. 그러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그게 전주의 모습일 겁니다."
동네.... 그런 동네를 탐색한다. 즐겁지만은 않다. 흔적을 더듬어 갈수록 사라져 가는 동네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가져본 적 없는 '나의 동네'. 하지만 '남의 동네'도 점점 사라져만 간다.
동네 (by 김현철): 4분 33초
작사, 작곡: 김현철
1989년에 발매된 '김현철 Vol.1'의 B면 첫 번째 곡.
각종 미디어에서 선정하는 한국 대중음악 명반에 반드시 '꼽히게' 되어 있는 앨범이다.
굳이 그런 명성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들어 보면 알게 된다. 이 한 장의 음반에 담긴 음악이 얼마나 좋은지. 소리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그런 얘기 자주 한다. 첫 시험에 100점을 맞아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참 난감해지게 된다. '10년(혹은 100 년인들)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작품을 낸 작가의 비애다. 그래서 그런 평가를 한번 내렸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더 이상의 기대를 강요할 필요 없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까.... 암튼 그래서 내게 김현철은 여전히 최고 등급의 뮤지션이다. 이 한 장의 앨범으로 충분하다.
유명한 곡들은 A면이 더 많지만, 이 앨범에서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B면에 몰려 있다. 가장 먼저 좋아했던 곡이 '동네'였고, 여태껏 가장 좋아하는 곡은 '나의 그대는'이다. '나의 그대는'은 연주를 좋아한다. '비가 와'도 꽤 괜찮은 곡이다.
80년대의 동아기획/서라벌 레코드는 그야말로 믿고 사는 레이블이었다. 어느 때는 거의 독과점 급? 당시에는 국내 음반은 그곳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을 정도... 모 그런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