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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Jan 31. 2018

공포와 마주하는 일

천경자 '생태' + Mike Oldfield 'Etude'

나는 뱀을 무서워한다. 뱀뿐만 아니라 그와 비슷하게 생긴 것들, 가령 미꾸라지라던가, 장어 같은 것도 무서워한다. 보양식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다. 뱀에 대한 공포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살면서 뱀이 나에게 피해 준 일도 없는데 말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예전 명칭) 다닐 때만 해도 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냇가를 건너려고 하다가 슬쩍 풀 숲을 헤쳤는데, 스르륵 달아나는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었고, 한 번은 배가 볼록하게 솟은 뱀을 길 위에서 마주치고는 손에 든 뭔가로 정신없이 내려친 기억도 난다. 같이 가던 친구는 칼을 꺼내 배를 갈라 속에 들은 개구리를 확인해 보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뱀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뱀이 나를 무서워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여전히 내게 뱀은 두려움, 공포의 상징이다.


작년에 서울 시립미술관에 가서 '천경자의 혼' 상설 전시를 보았다. 동선상으로 맨 마지막에 있는 작품이 '생태'라는 작품이다. 뱀 35마리를 그린 작품이다. 천경자를 세상에 알린 작품이고, 작가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한다. 처음 보는 작품이었는데, 몸이 아니라 마음에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실제 뱀 무더기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들고, '이런 걸 도대체 왜 그렸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그 그림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뱀의 머리를 세어보기도 하고, 각각의 뱀의 머리와 꼬리까지 따라가 보기도 하고, 서로 엉켜있는 모양을 보기도 했다. 그러는데도 두려움을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공포의 기운에 쓰여 있으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그림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 다시 시립 미술관을 들렀다. 다른 전시도 둘러보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 뱀의 그림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한 두려움으로 그 그림과 마주했다. 앞으로도 계속 나는 천경자의 '생태'와 마주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공포나 두려움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생태 (천경자), 이해를 돕기 위해 이미지를 덧붙이기는 하지만 모든 그림이 그렇듯 모니터 화면으로 보는 것은 큰 의미 없다. 고맙게도 상설 전시라 언제라도 시립 미술관에 가면 된다

천경자의 '생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곡을 하나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움, 삶과 죽음과 같은 감정이 표현된 노래이되 가사가 있다면 은유적인 표현이 적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당장은 떠오르는 곡이 없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천천히 찾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음악 파일이 저장된 외장 하드를 꼽으면서 늘 그렇듯이 정리된 순서대로 하나하나 뮤지션의 이름들을 훑다가 이래서는 뭐 답이 없겠다 싶어서 담에 또 찾아보자 생각하고 중단. 누워서 생각을 비우려고 애쓰는데, 멀리서 '튜블라 벨스(Tubular Bells)'의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래 이런 비슷한 느낌인데... 어쩌면 마이크 올드필드(Mike Oldfield)를 찾아보면 되겠다'하는 순간 영화 '킬링 필드(The Killing Fields)'의 사운드트랙 생각이 났다.


부랴부랴 다시 일어나서 찾아들었다. "빙고!" 


Etude (by Mike Oldfield): 4분 37초

작곡: Francisco Tárrega

1984년 영화 'The Killing Fields'의 사운드트랙 앨범의 마지막 곡. 영화에서는 (아마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의 배경 음악이다.

스페인의 작곡가 타레가(Francisco Tárrega)의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편곡했다. 클래식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타 연주곡의 하나이며, 클래식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이다.

원곡은 다른 영화에도 많이 삽입되었었는데, 가장 우명한 것은 르네 클레망(René Clément) 감독의 '금지된 사랑(forbidden games)'에서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가 연주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이 영 화의 메인 테마곡은 '로망스(Romance)'다. 얼핏 들으면 비슷비슷해서 나중에 헷갈리기 쉽다.

유난히 이름을 포함한 다른 고유명사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하나하나 다 언급하기는 조금 힘겹다. ㅠㅠ 하지만 모두 다 알아볼 이유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마이크 올드필드는 이 곡의 멜로디를 툭툭 끊어 던지듯이 연주함으로써, 영화의 여운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적절하게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르는 이 곡은 천경자의 그림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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