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 this little girl I carried?
숨이 말라 가는 어느 오후, 메마른 그늘 앞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로 길 가다 지나쳐도 몰라볼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기억 속의 그 사람은 서른도 안된 앳된 청춘이었습니다. 20년의 시간을 넘으려 합니다. 어떨까요? 괜찮을까요?
살짝 두렵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러운 것은 아닌지... 갖가지 생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갑니다. 드디어 만났는데, 생각보다 싱겁습니다. 어제 만났던 것처럼 가벼운 미소 만으로 오랜 시간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또 그게 전부입니다. 애써 지난 시간을 꺼내 놓지 않아도 좋고, 시시콜콜 서로의 생활을 묻지도 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그대로 일 수 있을까요?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이던지,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랬습니다.
사람 만나는 일을 애써 피해왔던 제가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있어 유일한 '아무것도 아닌 관계'입니다. 그저 그가 있고 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그도 일부일 뿐이고, 그가 아는 제 모습도 극히 일부이겠지요. 거기서 더 나아갈 필요도 없고, 그럴 거라 생각도 안 합니다. 서로의 어딘가 쯤에 그냥 있는 존재,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으니까요.
짧은 만남의 시간 동안 내가 보았던 것은 20년 전의 내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몇 개의 단어들로부터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정말 그랬었네요. 어떤 모양도 없고, 색깔이나 향, 맛도 없었던 그 모습. '도시의 시간' 속의 소녀들. 왜 그 소녀들이 사랑스러운지, 왜 그렇게 미소 지으며 계속 바라보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음을 약속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내일 일수도 있고, 몇 달 후 또는 다시 십 년이 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가 되든 여전히 제게는 딱 맞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2014년 11월 28일 1판 1쇄 찍음
2014년 12월 5일 1판 1쇄 펴냄
민음사
작년(2017년)에 산 책인데 여전히 초판본이다. ㅠㅠ 안타까운 마음... 그래서 더욱 좋아해야겠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는 가장 최근까지 19권이 나왔다. 대체로 괜찮은 작품들이 많은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호가 살짝 변한다. 이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애정이 가는 편에 속한다.
작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는 좀 힘들었다. 모호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들... 그런데 어느 순간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장면 안에서 벌어지는 생각, 대화, 작은 행동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매력에 눈을 떴다.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원치 않지만 정확하게 '소녀'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이 소설에 애정을 갖게 되었다. (후에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 읽고 나서 더 명확해지긴 했다)
지금은 매일 갖고 다니면서 아무 때나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1~2 페이지를 읽어 나간다. 어제 읽었던 부분이 나오기도 하고, 새로운 부분이 나오기도 하는데 별 상관없다. 그때 그때의 장면을 읽고 머리 속으로 그리고 미소 짓거나, 웃거나 혹은 무감각하게 다시 책을 덮는다. 이럴 수가 있나 싶게 나는 이 책과 사랑에 빠진 듯하다.
누군가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이런 작품이 폭넓게 많은 다양한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부분 열 장을 넘기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열광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 소설을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제니 준 스미스'의 모델이 린다 퍼핵스(Linda Perhacs)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저 우연일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치위생사로 일하다 프로듀서 손님을 만나서 음반을 내게 된 에피소드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사이키-포크'라는 장르의 뮤지션이 그리 많지 않다. 당연히 이 책에 어울리는 음악은 린다 퍼핵스가 되어야겠으나, 이미 작품의 일부이기에...
그래서 다른 뮤지션을 들 두루 매치시켜 보았다. Lorde라던가, Japanese Breakfast, Mitski 등 뭔가 '소녀' 감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가수들... 그런데 다들 뭔가 살짝 어긋나 있다. 국내에서도 다양하게 뒤져 봤는데,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결론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나 상황에 어울리는 곡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는 것. 책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곡이 없어서... 이대로 묻히나 싶을 즈음...
관점을 바꿔봤다. 이 소녀들을 바라보는 나. 이 작품을 사랑하는 나를 적극적으로 등장시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Sunrise Sunset'을 연결하게 되었다. 작품 자체가 감성적이어서 반대로 나는 서사와 시간을 얹어 보았다. 그리고 '만남'이 있었고...
Sunrise, Sunset: 3분 50초
작사/작곡: Sheldon Harnick/Jerry Bock
1964년 제작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삽입된 곡.
아들, 딸을 혼인시키는 장면에서 부모가 부르는 내용이다. 처음 작곡을 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래서 한 때 결혼식장에서 많이 불렸다고 하며, 후에 다양한 사정의 커플을 위해 살짝 개사한 버전도 내놓았다고 한다.
옛날에 이현세의 어떤 작품에서 마지막을 이 노래 가사로 정리한 게 있었는데, 그때 참 인상 깊었다. 그리고 아직 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본 적이 없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란 뮤지션이 있다. 한 장의 음반을 내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는데,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곡이 있었다.
여러 가수의 버전과 뮤지컬 배우들의 리코딩이 있으니, 취향대로 즐길 수 있고, 합창 버전도 많다. 이 곡의 가사와 멜로디는 참 좋아하는 데, 아직 마음에 드는 연주는 없다. 곡의 성격 때문이 대체로 굵은 남자 목소리의 가수들이 많이 불렀는데, 가사와 멜로디로 상상하는 장면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합창도 대체로 무겁고 장중한 느낌을 주어서 왠지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가볍고 담백한 느낌? 커다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고 난 후의 해탈한 듯한 느낌을 주면 좋겠는데, 대충 생각해도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과연 그런 커버가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혹시 스팅(Sting)이 이 곡을 한번 커버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마무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