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한다고 나쁜 것은 아냐
뭔가 위기(?)이긴 합니다. 5년 동안 써오던 가계부를 중단하게 되었는데, 이게 5년이란 시간 동안 익숙해진 것이라 그런지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뭔가 안정이 안됩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한다고 하던데, 아마도 많은 영향을 받았나 봅니다. 이 작업도 최소 1년을 보고 시작했는데, 이제 첫 고비인 것 같습니다.
보통 이런 고비 넘기는 데는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문장 모아 넣은 노트를 펼치고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빼진 것들 생각 없이 고르고, 사진은 맨날 쓰는 그(2012년 파리) 사진첩에서 고르고... 일단 때우고 보는 식이죠. 문장들도 사실 이제 바닥입니다. 그동안 책들을 버리거나 여기저기 뿌려대서 사실 새로 뽑은 문장들이 많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책들도 읽어야 하고요... 그래도 이전에 메모 해 둔 것을 옮겨 적으면서 15일 정도 앞서 나갔었는데, 지금은 거의 며칠 간격으로 따라잡았습니다. 이 와중에 그저께 읽은 책에서는 한 문장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ㅠㅠ
이렇게 억지로 하다 보면 영혼 없는 행위가 되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비를 넘기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건 순서상으로 이 앞의 포스팅에 포함되어야 했지만 내용이 너무 튀어 살짝 순서를 바꿨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30대의 친구라고 해야 할까요? 30대에 열광하고 40대 초반까지 열심히 읽었던 것 같고, 또 매력 있었는데, 어느 순간 멀어지네요. 최근에 서점에서 신간을 봤는데, 예전만큼 눈길이 가지 않았습니다. ㅠㅠ 사랑은 이렇게 변하나 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베르베르는 사전이죠. 한동안 매료되어서 나도 사전 만들어 볼까 생각해서 노트 하나 만들었는데, 얼마 안 가서 포기했습니다. 첫 고비에서 바로 탈락~
사실 얼마 되지도 않은 테드 창의 작품을 아직도 다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4편 남았습니다. 매 작품이 논문 수준처럼 느껴집니다. 그래도 초기 작품은 조금 낫고요. 뽑아낼 문장도 많고요. 저의 생각과 비슷한 것이 많다는 뜻이겠죠. (제가 교양 과학도 많이 공부했습니다. ㅎㅎ)
작품의 스타일이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여러 층이 중첩된 구조의 이야기 혹은 장면. 보통 생각만 많고 의사 결정이나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그 결과를 보니 새삼 반갑고, 그래서 태드 창, 테드 창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빌론의 탑]은 그 와중에 좀 싱거웠습니다. 오히려 읽고 이렇게 평가해주는 사람들이 더 대단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이것도 모던이면 모던이라고 할 만하겠네요.
작년 몇 분의 인문학 선생님들이 추천해 주신 책이 [열하일기]였습니다. 그래서 사놓고 한번 읽어야지 하면서도 잘 엄두가 안 났는데, 대놓고 연암 빠인 고미숙 작가님의 책을 읽다 보니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네요. 이제야 펼쳐 보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불씨를 지핀 문장입니다.
'어, 이건 내 관데?' 하는 놀라움...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어차피 신분제 사회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었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닐까?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뒤지고 털면 동네마다 숨은 고수들이 줄줄이 나타나잖아요. 그래서 작가 역시도 누구나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시대... 정도로 정리해 봅니다. (저는 아무개라서... 안되나 봅니다. ㅋ)
그 와중에 연암 박지원은 당대의 아싸라는 점이 끌립니다. 이렇게 사전 공부를 하고 나서 [열하일기]를 읽게 되니, 문장들이 제법 잘 읽힌다는 점도 뜻밖의 이득입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제목에서 '양자물리학'이 연상이 되나요? 테드 창의 작품들에 숨은 놀라움 중의 하나는 과학기술이 숨겨져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학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 기술에 의해 변화된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을 다룬다는 것이죠. SF소설에서 과학 기술을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도록 신경 쓴 흔적이 좋습니다. (뭐 저 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좋은 기술일수록 보이지 않아야 한다... 아니 진짜 좋은 기술이라면 보이지 않겠죠.
어쨌든 또 한 편 때웠습니다. 억지로 시작하긴 했지만, 두서없이 이것저것 써내려 가다 보니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은 더 많이 한 기분이네요. 이 정도로 만족하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