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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Nov 12. 2015

If living is without you

추억은 현재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이다.

기억은 편집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과거는 좋았던 것들, 남기고 싶은 장면들로만 재구성된 것 일 뿐, 나머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일 지도 모른다.


연대기라는 것이 대개 그런 것 같다. 중요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때가 있다. 한 나라의 연대기이든, 한 사람의 연대기이든. 나의 연대기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83년부터 88년까지 5년 정도다. 한 시절이라고 해도 좋다. 혼돈 속에서 하나의 인격체가 만들어진 시절... '빅뱅 시대'라고 이름 붙여도 어울릴 것 같다.


또다시 집 앞의 학교를 두고 먼 곳으로 학교를  배정받았다. 나와 같이 강남으로 이사 온 중동 고등학교. 중동 고등학교의 본격적인 강남 세대인 셈이다. 중학교 3학년부터 팝/록 음악에 눈을 뜬 나는 게걸스럽게 정보를 집어 삼켰다. 당시 외국의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별로 없었는데, '월간 팝송'을 비롯한 몇 개의 잡지를 친구들과 교환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 했고, 라디오 방송도 꼬박꼬박 챙겨 들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자랑스럽게 방송반에 입성할 수 있었는데, 이는 또 한 번의 빅뱅을 일으켰다. 방송반 동기 중에는 나를 포함 4명의 핵심 멤버가 있었는데, 4명의 음악 취향이 다 달랐다. 한 명은 재즈  마니아였고, 또 한 면은 프로그레시브와 아트 록 마니아.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나와 비슷한 록 마니아였는데, 금방 국내 포크 음악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들과의 친분은 또 한번 나의 음악 영역을 넓혀 주었다. 기본으로 LP 몇 백장씩 갖고 있는 친구들 이어서, 나도 본격적인 음반 수집을 시작하게 되었고, 듣는 영역도  넓어졌다.


방송반 활동이라야, 조회 시간에 음향 설치하는 것, 공지 사항 안내  방송하는 정도 밖에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음악 방송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2학년이 되어서  점심시간에 방송하는 것이  부활되었고, 우리가 담당하게 되었다. 대망의 첫 방송, 나는 교실에서 두근거리며 방송을 듣고 있었다. 오프닝 음악이 나오고 친구의 첫 멘트가 흘러 나왔다. 제법 근사 했다. 첫 곡은 해리 닐슨(Harry Nilsson)의 Without You. 그리고 그 곡은 우리 학장 시절 방송의 마지막 곡이기도 했다. 그 곡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송은  중지되고, 내 기억으로는 졸업 전에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급작스레 중단된 방송에 부리나케 방송실로 달려갔다. 선생님 한 분이 화를 내면서 방송하던 친구들을 훈계하고 있었고, 나를 비롯하여 뒤늦게 합류한 다른 방송부원들도 같이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학교에서 이런 음란한 노래를 트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가사 인지도 몰랐고, 음란하다던가, 저질이라던가 하는 기준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선생님이 그러면 그런가 보다 했다.


별거 아닌 일처럼 쿨하게 넘어 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이 기억은 내게 악몽처럼 남아있다. 마치 데쟈부처럼 이 날의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기도 하고, 후에 혹시라도 방송반이었던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도 같은 노래로 같은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왜 유독 이 나쁜 기억이 아직도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지나고 나면 대체로 좋은 기억만 남는 다고 하는데, 의외로 이 시절의 추억은 어두운 색이 많다. 추억이라고 하기 보다는 각인된 기억이 유독 많다. 패싸움하는 장면, 자퇴한 친구, 삥 뜯겼던 경험, 선배에게  폭행당한 이야기 등. 어쩌면 질문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이 왜 남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왜 기억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내 안 어딘가에 조그만 악마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Without you (by Harry Nilsson): 3분 17초

*1971년 10월 11일 발매(커버곡)
*해리 닐슨의 7번째 앨범 'Nilsson Schmilsson' 앨범의 6번째 (B면 첫 번째)

* 원곡은 Badfinger의 곡으로 1970년 발매

*작사/작곡: Pete Ham, Tom evans

*이 곡은 후에 머라이어 캐리의 커버로 한번 더 대박을 친다. 예전엔 배드 핑거의 곡도 가끔 들었는데, 좀 투박해도 그게 괜찮을 때가 있다. 그래도 이 곡의 맛은 해리 닐슨의 곡이 제일 좋다. 개인적으로 머라이어 캐리 스타일의 보컬을 금방 싫증 나는 편이라 거의 듣지 않는다.

*아주 가끔 노래방에서 직접 불러 보기도 하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어렵고, 후렴부의 음역대는 높다. 높아도 너무 높다. 앞 부분은 듣기에 근사하고 쉬운 것 같아 흉내 내 보지만, 그다지... 좋지 않다.

*커버곡이 많으면  많을수록 명곡일 확률이 높다.

*이 앨범은 Robert Dimery가 편집한 '죽기 전에 들어야 할 앨범 1001'에도 선정되어 있는 음반이다. 

*도대체 어디가 저질이고 음란한지 여전히 의문이다.

욕심을 버리자고 매일 다짐하는 데, 설마 좋았던 기억까지 버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쁜 기억을 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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