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학번이 되기까지
최고의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와 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는 상태이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만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더욱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장 그르니에, '자유에 관하여'에서 보쉬에의 말을 인용)
그 시절 일탈의 경계에서 간당간당하게 매달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소한 내 미래는 일찍 결정해버렸다. 그리고 그 미래에 대학은 의미 없을 것 같아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부모님과 치열한 배틀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내 의지는 굳건했다.
스스로 설정한 나의 미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당시에 KBS에 '세계의 걸작 다큐멘터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우연히 피카소 편을 보고는 감동을 받아서 나도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은 당연히 학자가 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니, 나는 대학에 안 가도 될 것 같았다. 원래도 학과 공부의 비중이 높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더 낮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심은 한순간에 바뀌게 되었다. 당시 입시는 몇몇 부분에서 과목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과목의 난이도가 있어 대부분 특정 과목에 편중이 되었었다. 나는 소수파(제2 외국어, 세계사 등)에 속하게 되었는데, 소수파다 보니, 정규 수업 시간은 없어지고 선택한 학생들만 모아서 보충 수업을 했다.
세계사 보충 수업을 하는 날이었는데, 수업 시작하면서 꾸벅 인사함과 동시에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그리고는 수업 끝나고 인사할 때 깼다. 그때 스스로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선택한 과목에 대해서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해서도 공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제대로 공부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날 나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어느 학교든 상관없었다. 대학에 가서 공부다운 공부 한번 해보고 일을 하자고 다짐했다.
비록 뒤늦은 각성이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에 또다시 무책임해지기는 싫었다. 그 해 여름... 나는 좀 지독했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베트 미들러(Bette Midler)의 The Rose였다. 이 노래는 가사를 듣고, 해석한 후에 좋아하게 된 특이한 경우였다. Some say love, it is a razor that leaves your soul to bleed. 이 부분을 좋아했었는데, 의미보다는 razor라는 단어와 soul to bleed 부분의 발음이 좋았다.
나는 지금 껏 내가 선택한 대로 살아 왔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혹은 상황에 떠밀려 무언가를 억지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때문에 늘 다른 사람도 그러하길 바란다. 때론 '하기 싫으면 하자 마'라고 매몰차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중학생 아들에게도 스스로 재미나 필요성을 깨닫고 공부하기를 바란다. 일단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갖게 된다.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늘 내가 좋아하는 일만 했던 것도 아니다. 때론 하기 싫은 일도 스스로 선택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그 일을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의도적이지 않아도 무슨 일을 하던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고, 거기게 집중하면 되었다. 힘든 면이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그 순간을 위해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좋아하는 일을 일로 삼지 않으려도 피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명백하게 '88학번'은 나의 의지에 의해서 붙여졌다. 처음 하는 선지원 후시험이었지만, 무조건 가야 한다는 전제 아래 학교를 선택했고, 그 결과에 후회는 없었다. 처음 취업을 할 때도 망설일 것도 없었고, 회사의 이름이나, 크기 같은 건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 이건 아주 가끔 후회하기도 한다. (^^;;;)
결과적으로 이처럼 사나, 다른 방식으로 사나 별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특출 난 사람도 아니고, 결국 멀리서 보면 다 먼지 같은 존재고 다 똑같이 떠다니는 존재일 뿐 아닐까?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알아주고 내가 즐기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 TVN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시작했다. 여기... 한 명의 88학번이 응답하고 있다.
The Rose (by Bette Midler): 3분 40초
*1980년 3월 발매
*1979년 동명 영화 사운드 트랙(엔딩 크레딧)
*작곡: Amanda McBroom
*원래 영화 삽입곡으로 써진 곡은 아니었지만, 이 전에 리코딩된 곡은 아니었다고 한다.
*2006년에 Westlife가 커버했었는데, 난 이 버전을 들어 보지 못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영국에서 싱글차트 1위까지 기록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많은 가수들이 커버했는데,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직! 베트 미들러!!
* 영화 로즈는 애초에 재니스 조플린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였지만(제목도 'Pearl', 가족이 반대하는 바람에 가공의 인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영화의 주연도 베트 미들러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어떤 과제가 주어지든 간에 그 일을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행복했느냐?라고 묻는다면 아직까지 불행하진 않다고 대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