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기념품
나의 모든 걸 걸었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그때까지의 나는 사라져야 맞다. 모든 걸 걸었다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표현이니까. 나이 서른, 그것은 치기 어린 20대의 나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내가 천재라면 나는 서른을 넘기지 않았어야 했다. 때문에 난 서른에 나의 모든 걸 걸었다.
처음에는 기술이 중요한 줄 알았다. 편집기의 조그를 돌리는 손놀림 같은 것? 그게 실력인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계와 싸웠다. 그 기계들이 가진 기능을 잘 알고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애를 썼다.
어느 케이블 TV에 '저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의 조연출을 할 때였다. '돛대를 태우는 여자'라는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저자를 섭외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연락이 다았고, 직접 만나게 되었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출연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생겨나고 있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의 뭔가를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뭘까 라는 고민을 했다.
어린 나의 눈에 PD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말하는 것'이었다. 어떤 어떤 아이템을 가져와봐라, 이런 장면을 이렇게 찍어라. 편집을 할 때는 그때 그 장면을 써라, 순서를 이렇게 바꿔봐라 등등. 그런 걸 지켜보면서 완성된 프로그램은 누구의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했다. 내가 볼 때, 하나의 프로그램을 누구누구 PD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였다. 어떤 경우는 아이템에서 구성까지 한 작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영상은 카메라 감독이 만들어낸 것이었으니까. 뭔가 부당한 느낌? 이 들었다. 때문에 직접 촬영도 하고 싶었고, 편집도 가능하면 다른 사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당연히 글도 내가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게 그런 것이었으니까.
진짜 PD가 하는 일이란 그런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내서 그걸 이야기하는 것. 현란한 기술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출연자의 영화 같은 삶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든지, 그 삶에 깔려 있는 정서를 표현하든지, 아니면 그런 삶을 겪고 난 지금의 감정을 이야기하든지... 결국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것을 찾아내고 결정하는 능력이었고, 그건 기술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를 계기로 나는 또 한 뼘 성장했다.
20대의 나는 욕심이 과했다. 그 욕심은 그 이후로도 꽤 오래 이어지긴 했지만... 서른 살 이전에는 어떤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것도 같았다. 때문에 혼자 다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온전히 나만의 것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작업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다. 당시 QTV라는 다큐멘터리 케이블 채널에서 '비틀스 앤솔로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로 했는데, 예고편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왔다. 선배 한 분이 그 일을 가져왔고, 나에게 일이 넘겨졌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일이 주어진 것이다.
비틀스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그 다큐멘터리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한 어떤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이 본편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까를 생각했다. 그것만 해도 다양한 관점이 서로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대체로 예고편은 가능하면 멋진 장면들을 빠르고 현란하게 보여주는 것이 대세였던 때였다. 그래서 각종 효과가 난무하고, 그것을 위한 아이디어를 고민하곤 했다.
나의 선택은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틀스가 처음 미국을 방문하던 그 순간이었다. 비틀스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골랐다. 그리고 그 얼굴들을 느리고 짧게 보여 주었다. 페이즈 인/아웃을 통해 한 컷의 시간은 1초지만 실제 화면이 보이는 것은 0.5초. 나머지는 실질적으로 검은색 화면이다. 전체 15초 중의 8초를 그렇게 사용했다. 점점 더 짧게 보여 주면서 속도감과 긴장감을 높이고, 나머지 시간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오르는 순간 한 컷만을 사용했다. 음악은 'Let it be'를 썼는데, 평소에 이 곡의 피아노 전주를 좋아했는데, 첫 음이 좀 더 치는 느낌으로 세게 나왔으면 어떨까 생각하던 차라... 소리 크기를 살짝 조정하여 퉁 치고 나오게 만들었다. 처음의 8초는 완전 무음으로 진행하다고 퉁! 하고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완성된 예고편은 적어도 나에게는 근사했다. 다만 납품을 했는데, 오디오 무음은 안된다고 해서 그 부분은 수정을 해야 했다. 어쩌면 큰 차이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소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 작업은 나 자신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로는 기술보다는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되었고, 불필요한 과정이나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원본의 마스터 테이프는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나에게는 혁신이었고, 남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했던 것이었고,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낸 것이었다. 그것은 내 20대를 상징하는 기념품 같은 것이었다. 스쳐 지나가버린....
*Let it be (by The Beatles): 3분 50초
*1970년 3월 6일 발매(싱글)
*작사/작곡: John Lennon, Paul McCartney
*1970년 3월 8일 발매된 비틀스의 12번째 스튜디오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6번째 트랙으로 실려있다.
*내가 첫 번째로 소유한 비틀스의 LP인데, 구입한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누구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정확하게 어디가 먼저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들국화의 1집 앨범 커버가 이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했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들국화의 비틀스의 유사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그중의 하나로 최성원과 폴 매카트니가 비슷하다는 주장을 펼치곤 했다.
*2007년에 비틀즈의 곡으로 만든 뮤지컬 영화 'Across the universe'에서 'Let it be'가 가스펠 스타일로 편곡되어 삽입되었는데, 이 곡이 나올 때와 화면과 가스펠 풍의 편곡이 내가 만들었던 예고편과 같은 종류의 느낌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고통스럽지만, 짜릿한 쾌감' 같은.... 맞다. 이건 변태적인 감성이다.
*Let it be의 가사는 여전히 내가 후배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테마다. 다만 '내버려두어라'라기 보다는 '받아들여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비틀스는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은 후기, 그러다 결국 지금은 초창기 곡들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겪었는데, 이것도 한 패턴인 것 같다. 중간의 황금기가 아무래도 곡의 완성도는 뛰어나니까, 그러다 후기의 짙은 감성에 물들다 보면, 결국 초기의 패기를 사랑하게 되는 패턴...
*지금은 굳이 비틀스를 찾아 듣게 되는 경우가 없는 것 같다. 정말.... 들을 만큼 들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서른을 넘기게 되었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