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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Dec 09. 2015

Today is the greatest day

맨 손으로 싸우는 법

맨 손으로 싸울 때, 이기기 위해서는 맨 손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일찍부터 확실하게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건, 일단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얼핏 그게 당연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에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빈도수로 따져 봐도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나와서, 첫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런 고민을 시작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신입 사원 면접을 볼 때,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절반은 경험을 쌓으면서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의 상당수는 입사를 위한 거짓말 아니면 판에 박힌   '정답'일뿐이다.


그런 면에서 난 소수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장래 할 일을 정하고 결국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진 것 하나 없는 맨몸이었지만(이 경우는 또 다수에 속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조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일을 시작했으니 어서 빨리 조연출 딱지 떼고, 연출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만이 있었을 뿐이다. 일이 어려운 적도 없었다. 내가 모르는 기술적인 일은 빨리 배우면 되었고, 시간은 너무나 많았다.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고, 요일 구분도 없었다. 그렇게 회사에 죽치고 살았다.


4학년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일을 시작했는데, 졸업식 전까지 2번 잠깐 학교에 들렀을 뿐이다. 그것도 학점 때문에 출석 정리하러 간 것일 뿐. 지금도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할 때,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은데, 알고 보면 4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그때 나는 이미 학교를 떠나 있었다.


모든 걸 맨땅에 헤딩해야 했지만(예를 들어 섭외를 한다고 해도 대체로는 아는 사람 찾아서  소개받고 이런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그냥 무작정 전화하고, 사정하고 그랬다. 때론 전화번호를 알기 위해서도 생면부지인 사람에게 물어봐야 했다), 그냥 하면 됐다. 적어도 안 되는 건 없었다. 왜냐하면 될 때까지 했으니까.


그때 내  마음속에 간직한 한 가지는 나만의 '천재론'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 인솔 하에 단체로 설악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이 '너네들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천재론 하나쯤 갖고 있으면 좋다'는 것이었다. 당연  남몰래 천재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유효 기간을 서른 살로 잡았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진정 천재라면 서른 살 이전에 증명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나의 20대는 서른만 보고 달렸다.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빌리 코건(Billy Corgan)은 내가 생각하는 천재 중의 하나다.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그게 다행으로 작용한 면은 메이저 데뷔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겠고, 불행이라면 그 그늘이 컸다는 점일 것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요즘처럼 천재 소리가 난무하던 때가 아니었다. 천재라는 단어는 일종의 금지된 단어처럼 조심스럽게 꺼내야 하는 것이었고, 아무에게나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천재는 히어로가 아니었다. 천재란 모든 것을 다 이루고도  아무것도 아닌 척,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시크한 존재여야 했다. 빌리 코건이 만든 음악들은 무척이나 정교했다. 지글거리는 그런지 사운드이면서도 훨씬 정제되고 계산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서서 외치지 않고 늘 커튼 뒤에서 냉소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느낌? 특별하게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느낌....


전부를 기억할 순 없지만 그때 난 행복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행복이니 불행이니 생각할 틈조차 없이 하루하루 사는 데  몰두했으니까. 지금보다 더 가진 것 없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편했으니까.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바빴지만, 바쁘다는 이야기를 하지도 듣지도 않았으니까.


*Today (by Smashing Pumpkins): 3분 19초

*1993년 9월 30일 발매 (싱글)

*1993년 7월에 발표된 스매싱 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두 번째 앨범, 'Siamese Dream'의 세 번째 수록곡이며, 두 번째 싱글

*작사/작곡: Billy Corgan

*이 앨범을 처음 듣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다. 아마도 96년 이후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난 얼터너티브에 열광하지는 않았다. 앨범 커버가 눈의 띄어서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는데, 완전 대박이었던 셈이다.

*최근에는 스매싱 펌킨스의 음악을 아트록 혹은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보았다. 확실히 3집은 개인적인 평가지만 핑크 플로이드의 월과 맞먹는 수준 높은 대작이었다.

*하지만 가사는 많이 우울한 내용이다. 'Today is the greatest day I've ever known'이란 가사는 오늘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자살하는 심정을 그린 것이다.

*도입부의 리프는 어떤 경우는 그냥 주르륵 눈물이 흐를 듯한 기분을 줄 때가 있는데, 가사를 소리로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만든 곡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아름답다.

*이 곡은 작년에 특히 많이 들었던 음악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사를 이해하기 시작했으니까.


맨손으로도 잘 싸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맨 손임을 잊어야 하고, 싸움은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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