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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Dec 21. 2015

No, woman, no cry

눈물 많은 시대, 그래도 울지 말아요...

눈물이 많은 시대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렇다. 기껏 국가에 충성하라고 떠벌리면서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한다. 대통령 때문에 흘리는 많은 눈물은 사라지고, 대통령의 (가짜) 눈물만 보여지는 시대다.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운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파서 울고, 분노해서 운다.


조연출 시절에 편집하면서 출연자가 눈물 흘리는 장면을 모두 잘라내 버린 적이 있었다. 후에 선배가 보고는 왜 그 장면들을 다 뺐냐고 나무랐고, 난 당당하게 '눈물을 보여 주는 것보다는 보여 주지 않는 것이 더 슬픈 겁니다'라고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야 내가 힘이 없던 시절이니까 고스란히 원상  복구해야 했지만...


영화를 보면서 잔인한 장면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는 장면도 잘 보지 못하게 되었다. 두 가지 모두 내가 감당하기 어려워서다. 특히나 눈물은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에 더 힘들다. 나 자신의 초라함이 더 미안해지고 안타깝게 생각된다.


내가 반 눈물주의자(?)가 된 이유는 눈물 흘려봐야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지극히 메마른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눈물 흘려서 내 안의 불순물을 밖으로 빼낼 수 있다면... 그러니까 걱정이 있을 때, 걱정을 없애고, 슬플 때, 그 슬픔을 지울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다지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한 사람의 가장(? 사실 관계는 제쳐 두자,ㅡㅡ;)으로서나, 조직의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은 그저 눈물 흘려서 끝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레게 음악만 놓고 보면 낙관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대체로 밝고, 흥겹고... 자연스럽게 몸을 들썩이고... 그러다 밥 말리의 레게를 알게 되면서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때는 뭐랄까 한이 깃들여진 음악이라고 느꼈다. 그러다 조금 더 깊에 알게 되고는 그 저변에 깔린 소박한 감성과 낙관성에 다시 감탄하고 있다.


'No, woman, no cry'를 라이브 버전으로 들으면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장엄한 분위기... 비유하자면 싸이가 미국 양키 스타디움에서 관객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까지 느꼈는데, 스튜디오 앨범에서 실린 버전을 들어 보면, 무엇보다 작고 소박한 느낌을 먼저 느낄 수 있다. 간절하게 외치는 부분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앉아서 울지도 않는다. 조심스럽게 상대를 일으키고, 천천히 움직이게 한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고,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다 괜찮아질 거야...'


가장으로서, 조직의 리더로서의 역할이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것이라면, 눈물을 닦아 주고 위로하는 역할을 누가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사람은 과연 있는가 생각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인기 있는 '걱정 말아요, 그대' 같은 노래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요청 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재주가 없는 게 아쉽긴 하다.


*No Woman, No Cry (by Bob Marley & The Wailers): 7분 12초 (라이브 버전)

*1975년 발매

*1974년 10월 25일 발매된 'Natty Dread' 앨범에 2 번째 곡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전설이 된 곡은 런던 공연에서 녹음된 버전으로 1975년 발매된 'Live!' 앨범에 실린 라이브 버전이다. 1975년에 발매된 싱글도 라이브 버전이다.

*작사/작곡: Vincent Ford (보통 credited  to라고 표기를 하는데, 실제로 곡은 밥 말리가 만들었다고  보여지는데, 이렇게  표기된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김민기의 곡들이 금지 시절에 다른 이름으로 표기된 적이 있었다.)

*한 때, 앞으로 남은 생동안 한 뮤지션의 음악만 듣는다면 밥 말리를 선택하겠다(페이스북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할 만큼 한번 빠지면 무궁무진한 세계가 펼쳐진다. '장르의 한계를 넘었다'라고 보통  이야기하는 데, 장르를 넘지 않고서도 우주를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뮤지션이 하나 더 있다. 탱고의 피아졸라도 그런 경우다. 이들의 경우는 굳이 다른 장르를 시도할 필요가 없지 않았던 것 아닐까?

*같은 이유로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는 것도 좋지만, 한 장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아마도 'Playing for change' 프로젝트가 가장 사랑하는 뮤지션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논리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잘 어울리니까...

*같은 제목의 유명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디지털 이미지로는 제대로 보기 어렵지만, 그림의  눈물방울 안에 어떤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실제로 보지 못해서... ㅠㅠ) 아픔은 종종 예술로 승화되기도 하는데, 우리만큼 아픈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우리 예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No woman, no cry" by Chris Ofili (1998년) 현재 영국 테이트 미술관 보유. 1998년 터너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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