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oke Jan 16. 2016

그러나 후회만이 남았어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하기 전....

세기말... 1998년에서 1999년 초까지 백수 생활을 1년 가까이했었다. 젊은 날의 환상과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었거나, 공허함을 마지막까지 불태우는 그런 과정이었을 것이다. 무언가 쫓기는 듯한 조바심은 천천히 사라지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복잡한 관계들도 다 정리가 되었고, 어떤 목적도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세상을 유영했다.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었고, 권리도 없었다. 나의 주요 일과는 오후  1~2시쯤 일어나 밥을 먹고, 음악을 듣거나, 홈페이지 좀  둘러보고, 5시쯤 집을 나서 사무실에 잠깐 들르고, 저녁이 되면 강남역의 칵테일 바에 가는 것이었다. '엉클 29'라고 처음 갈 때는 작은 바였는데, 바텐더, 매니저 심지어 주방장과도 친구가 되어 입장만 하면 가게 문 닫을 때까지 죽치고 있었다. 가끔씩은 가게 문 닫고 바텐더 친구와 소주 마시러 가거나 더 늦게 문 닫는 다른 바에 가기도 했다. 당연히 일어나는 시간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사람들 만나고 이야기 듣고, 음악  이야기하고... 그랬다. 돌이켜 보면 뭔가 내가 부족하다거나 불편하다거나 하는 것이 전혀 없었던 유일한 시기가 아니었다 싶다. 무언가 얻고 싶은 것도 꼭 이루어야 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고, 세상은 여전히 빨리 돌아갔지만, 나는 혼자 멈춰 서서 그런 풍경을 구경했다.


그런 가운데 이제는 결혼이란 걸 생각해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20세기의 끝자락에 결혼을 했다. 돌이켜 보면 지독하게 조용하고 잔잔한 시절이었다. 갱톨릭의 '후회'를 좋아하는 이유가  가사보다는 배경 연주가 이때의 풍경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소리 없음'이 주는 커다란 아우성을 믿는다.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없을 때, 느껴지는 커다란 울림. 후회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딱히 그때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런 정적 속에서 살아나는 격렬한 느낌. 그건 화일 수도 있고, 슬픔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쁨이기도 하다. 공허하고 허전한가 하면, 어느 구석에선가 무언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보이는 기분.... 후회는 아쉬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회하고 있다는 것과 후회 없다고 하는 것은 묘하게 닮아 있다.


20세기 말의 30년은 우연찮게도 내 삶의 1막과 일치한다. 나이 서른과 세기말... 그 의미가 우연찮게 맞아떨어졌고, 집착하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로 엉켜 지금도 큰 덩어리로 남아 있다. 그렇게 제법 스펙터클 하게 한 막은 내리게 되었고,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내 삶도 2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후회 (by 갱톨릭(Gangtholic)): 6분 24초

*1999년 3월 13일 발매

*갱톨릭(Gangtholic) 1집, A.R.I.C(Another Revolution Is Coming)의 6 번째 곡.

*작사/작곡: 갱톨릭 (김도영, 임태형)

*잠시 앨범 발매 연도를 착각했었는데, 그전에 이미  공연장에서 친숙해져서 그런 것 같다. 한 번은 공연 후 뒤풀이에서 잠깐 인사하고 술 한잔 했었는데, 앨범은 이 이후에 나온 것 같다.

*당시에 국내에서는 드문 갱스터 랩을 하는 친구들이라고  소개되었다. 공연과 후에 음반으로 드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는데, '변기 속 세상'은 공연에 비해 앨범은 그 느낌이 훨씬 약했다. 암튼 한국 힙합의 선구자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친구들이다. 지금의 힙합 곡들과 비교해도 그렇게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사운드도 좋고, 랩도 안정적이다.

*'후회'라는 곡은 공연에서는 듣지 못했던 곡이다. 곡 자체가 앨범용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다른 곡에 비해서는 너무 매끈하다고 해야 하나? 다른 곡들의 거친 느낌에 비해 이 곡은 정돈이 되어 있는 편이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좋아하는 곡이 되었다.

*아이튠즈에서 자동 집계되는 '많이 재생한 음악 25' 리스트에 빠진 적이 없다. 내 삶 전체를 통틀어도 탑 10안에 드는 곡이다. 이 곡을 만든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심하게 감정 이입이 잘 된다.

*이후 2집 앨범까지는 잘 들었는데, 이 이후로는 멀어졌다. 아마도 단독 앨범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이 서른에 우린 기억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