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아름다워지는 건, 이별 후에 홀로 섰을 때부터다.
모든 슬픔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나, 어떤 슬픔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
내가 구입한 첫 번째 클래식 LP는 'Great Opera Choruses'라는 편집음반이었다. 딱히 클래식이라고 의식한 건 아니었고, 합창곡을 한창 좋아했었다. 커버의 제목만 보고 샀다. 그 안에 어떤 곡들이 있는 지는 아무것도 몰랐다. A면 첫곡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처음 들었을 때 바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 이전에 몸과 마음이 절로 바람에 실린 듯이 둥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곡이 끝날 때는 얼나마 아쉬웠는지 러닝 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정도였다. 지금도 들을 때마다 바람이 잠깐 머무르다 떠나 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때로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예의 삶을 살면서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될까? 슬퍼서, 슬프니까 아름다운데... 노래를 하는 사람들도 과연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할까? 아니겠지...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다는 식의 꾸밈은 차라리 하지 말아야 한다.
슬픈 사람은 그저 슬플 뿐이고, 그 슬픔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할 뿐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표현의 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내 안의 아픔을 밖으로 내보내고 또 내보낸다. 그래서 마침내 슬픔이나 아픔과 이별을 하게 되면, 그제야 그것들은 스스로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한다. 자연의 많은 것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고통이 모이고 모여서 아름다움의 결정체가 된다.
그럼에도 내가 선뜻 긍정과 낙관으로 마무리하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 때문이다. 우리는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누구나 어려움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다. 누구나 크든 작든 빛나는 자기만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찍 헤어지고, 어떤 사람은 그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무엇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것들과 끝내 죽음을 통해서야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야말로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아름다운 것으로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그런 무명의 슬픔이 모여서 만들어진 아름다움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 역시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같이 모여서 노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Chorus of The Hebrew slaves: 3분 12초 (공연마다 시간이 달라서.. 딱히 곡의 러닝 타임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 중 3막에서 히브리 노예들이 부르는 노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알려져 있고, 첫 가사가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이다. (원 대본이 이탈리아어이기 때문에 한글로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나부코는 베르디가 1841년에 작곡하고, 1842년 3월 9일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본은 이야기하면 긴데, 구약 성서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완성되었다. 종교적인 해석이 많은데... 나에게 그런 거는 있을 수 없다.
이탈리아 통일을 견인했다고 해야 하나? 암튼 통일 이탈리아의 송가(Anthem)이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가장 상위에 뜨는 것이 2002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 영상인데, 가장 좋은 점은 무려 9분이 넘는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