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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May 31. 2016

(남자 혹은 아버지)의 자리

A star to my father (Thierry Lang Trio)

오래전 어느 더운 토요일(일요일인가?) 오후, 지인의 결혼식장에 다녀오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술에 취한 걸음걸이로 메마르도록 맑은 낮을 걷고 계시던 모습은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느덧 그 날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고, 가끔씩은 나도 그런 모습으로 비치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아버지란 빈자리를 통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어쩌다 집에 들르면 아버지는 안 계신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가만히 집을 둘러보면 당신의 존재가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막상 마주 대하고 나면, 건너기 어려운 서로 다른 세상을 깨닫게 되고는 다시 씁쓸해진다. 


존재가 아니라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일... 한 남자의 자식으로 또 한 자식의 아버지로서, 이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125쪽, '남자의 자리(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2년) 

*남자의 자리 (La place)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2년 4월 30일)

*흐릿한 기억으로 2013년 4월 초에 '한 여자(Une Femme)'를 먼저 읽은 것으로 기억난다. 같은 해 여름인가에 이 책을 읽었었던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별 느낌 없었다. '그냥 아버지 이야기구나' 정도? '한 여자'의 경우는 마지막에 가서 충격에 가까운 큰 울림을 받았는데, '남자의 자리'는 그보다 더 메마른 느낌? 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읽었는데, 이번에는 여건이 돼서 천천히 읽기도 했지만, 한 장마다 던져지는 무게들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세상에 비슷한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우리(한국) 아버지들의 삶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작가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문, 감정 배제하기, 멀리서 보기 등 자기 자신마저도 분리해 놓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글쓰기는 잔인하다고 느낄 만큼 오히려 처절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이 이런 글쓰기라고 생각해서 연습 중인데, 확실히.... 흉내를 내는 것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다른 종류의 일이라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내게 주어진 재주가 아니라는 것도...


*A star to my father (by Thierry Lang Trio): 5분 56초

*작곡: Thierry Lang

*1993년 발매된 티에리 랭 트리오의 'Private Garden' 앨범에 첫 번째 곡이다.

*티에리 랭은 스위스 출신의 작곡가이자, (재즈) 피아니스트다. 재즈, 블루스 피아노 등을 좋아했지만, 성인이 되기까지 클래식을 공부하여 클래식과 재즈의 느낌이 결합된 것이 그의 특징이라고 한다.

*'Private Garden' 앨범은 혹자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앨범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나는 평보다는 직접 들어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번 들어 보면 다 알게 될 테니까....

*아버지에 대한 노래는 2곡 정도 좋아하는 곡이 있다. 정태춘의 '사망부가', 노래마을 사람들의 '아버지 꽃'이다. 그런데 이 2곡은 추모의 가사가 있어서... 오히려 책의 내용과는 어울리지만, 내 (아직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입장에서는 닫힌 느낌이 들어서 이 곡으로 골랐다.

*앨범은 밤에 별이 많이 보이는 곳에 누워서 들으면... 최고로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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