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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ke Jul 04. 2016

나, 이제서야... 알았네

disconnection

내 삶의 가장 처참한 하루가 지났다. 말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내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오늘이 다시 시작되었다. 머리는 맑았고, 몸은 가벼웠다. 맑은 날에 비가 내리기도 하지만, 비가 내리고 난 후에는 하얀 아침이 오기도 한다. 다시 거리로 나왔다. 몇 시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 시간을 잘 보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늘 보이니까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었을 뿐... 눈에 시간이 보이지 않으니, 가장 먼저 궁금해졌다. 몇 시쯤이나 된 것일까? 얼마나 많이 잤을까? 하지만 굳이 시간을 찾아보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걸었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도, 노트북도. 인터넷도, TV도.

최근의 4~5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사이버 워커(자리에 없어도 부르면 답한다는 의미)'라고 부르기도 했다. 내가 사용하는 기기만 해도 PC 2대, 노트북 2대, 스마트폰 2대, 잘 쓰진 않지만 태블릿까지... 한 때는 완전한 모바일 워커로서 그게 나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그게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문제는 내가 잘못된 상자 안에 있었다는 것일 뿐.


노트북이나 PC는 둘째 치고, 스마트폰이 없다는 사실은 당장 내게 몇 가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우선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하나도 없다는 것. 대학생 시절에는 50개 이상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는데, 지금에 와서는 당장 하나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두 번째가 시간이다. 평생 시계를 차고 다닌 것이 채 1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게 불편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런데 막상 확인을 하고 싶은데 못하니 조금은 불편해졌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 속에 얽매여 살았던 것일 뿐이다. 네트워크화된 세상이 더 좋은 것이라고,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준다고 믿고, 그 속에 적응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열고 뉴스를 안 본다고, 출근길에 동영상을 못 본다고 그게 큰 일은 아니다. 필요한 전화번호는 메모해서 갖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그게 그렇게 불편하거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나는 그저 잊고 살아갈 뿐이었다. 어제까지 해왔던 것들을.


일도 마찬가지다. 불평을 하든, 열정에 넘치든 상관없다. 그게 하루하루 쌓이면 그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성공을 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그래서 성공은 무엇이고, 돈을 많이 벌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냥 그렇게 휩쓸려 왔을 뿐이다. 왜 일을 하는지? 행복하게 사는 건 무엇인지 까맣게 잊은 채로, 내가 속한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점점 갇혀갈 뿐이다.


처음에는 무언가 세상과 분리된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에도 비껴 나 있고, 눈에 보이는 풍경도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차도를 벗어나 걷다 보니, 늘 보던 분주한 아침도, 사람들도 사라져 버렸다. 버릇처럼 주머니를 뒤져 스마트폰을 찾는 것도 잠시, 금방 내 상황에 익숙해 지고, 그제서야 나는 길을, 길 주변의 모습들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서야... 내가 모르는 세상을 보게 되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 아마도 이런 비슷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의미로 보면 나는 이제서야 제대로 죽었다.


나 이제서야 (by 김경호): 4분 22초

작사/작곡: 이승호 작사, 유승범 작곡

1995년 발매된 김경호 데뷔앨범의 일곱 번째 수록곡

앨범 커버 이미지를 뒷면으로 한 이유는 이 앨범의 경우 앞면보다 뒷면을 훨씬 더 많이 봐서 그렇다. 그리고 머리 짧은듯한 그리고 풋풋한  김경호의 얼굴이 괜찮아서... 

이 앨범 발매 당시에 괴물 보컬의 등장이라고 잡지 등에서는 꽤 밀어 주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곡도 록이라기 보다는 팝에 가깝다. 이후 2집에서부터 지금까지... 그 김경호다. 개인적으로 김경호가 록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다만 지금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한다.

이 앨범을 듣자 마자 나는 '나 이제서야'에 꽂혔었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닌데,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당시에 삐삐를 사용하면서 내 목소리 대신에 노래를 녹음해 놓곤 했었는데, 이 노래를 녹음해 놓았을 당시 두 개의 메시지를 받았다. '어... 번호를 잘못 눌렀는데, 음악이 좋아서 다 들었습니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모르는 사람의 것과 '노래 듣다가 할 얘기를 잠시 잊었어요. ㅎㅎ 그냥 OO씨 목소리 듣고 싶었었는데, 노래가 참 좋네요. 그래도 전 목소리 듣는 게 더 좋아요. 나중엔 목소리 들려 주실거죠? 행복하세요.'라고 잘 아는 사람이 남긴 메시지.

다 좋은데, 사실 어딘선가 들어 봤던 곡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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