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밖을 걷기
달맞이 고개로 걸어 올라가다 보면 숲길로 빠지는 샛길이 나온다. 전에도 몇 번 와본 적이 있지만 택시를 타고 올라가거나, 도로 옆 인도로 걸어 올라가기만 해서 몰랐던 길이다. 어디 가야 할 곳도 없었기에 그 길로 빠졌다. 아침 운동과 산책을 하는 분들이 아주 가끔 지나쳐 가고, 그 밖에는 축축한 침묵만이 가득한 길이었다.
그렇게 가다 보니 기찻길이 나왔다. 송정으로 가는 기찻길인데 새로운 길이 생기면서 폐길이 되었고, 덕분에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 고개 도니 작은 포구가 나왔다. 청사포라고 한다. 지독하게 한가로운 바닷가였다. 시간을 보니 10시 정도? 방파제 위를 어슬렁 거리다 다시 마을 입구로 나왔다. 그리고 가게에서 휴지와 물 등을 샀다. 방황이 여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다시 기찻길로 송정까지 가고, 그곳에서는 해안로를 따라 걸었다.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다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은 조용할 뿐이었다. 해동용궁사를 거쳐서 호텔 공사 중인 현장을 지나, 해광사 앞에서 잠시 앉았다. 날은 깨끗하게 맑았다. 신발이 불편해서 그리 빨리 걷지도 못했지만, 그때가 2시 조금 넘었었던 것 같다.
조용했다. 어제까지 그렇게 격렬했던 내 머리 속도 그 조용함에 젖어 잠시나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걷다 보니 내 발 끝을 보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저승길이 있다면 이런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살아서 세상 속을 걷고 있지만, 느낌은 세상 밖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기분을 깨우는 허기가 느껴졌다. 젖병 등대가 보이는 곳에서 이만 걷기를 멈추고자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걷기보다는 바닷가 마을에서 지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모텔을 잡고 눌러앉았다.
왜 느닷없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돌이켜 보면 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 주목했었던 것 같다. 그 대국이 화제가 되었던 10여 일 전에 술자리에서 이세돌이 한 번이라도 이기면 그게 대단한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묘하게도 내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그 대국은 내게 어떤 의미가 되어 다가왔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더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을 규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정확함과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었다. 인공지능 혹은 기계와 비교해 볼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보잘것 없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부산에서 대변항(당시 내가 멈추었던 곳에서 20분 정도만 더 걸으면 대변항이다.)까지 차를 타고 가면 20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그 길을 나는 6시간을 걸어서도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니까...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억지로 포장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바둑의 기본 원칙이 주는 의미는 내게 의미 심장했다. 스스로 집을 짓거나 아니면 다른 돌과 연결되거나... 결국 이게 삶의 모습 아닐까? 바둑에서도 '산다'라고 표현하니까. '미생'의 이야기도 결국 이것에 다름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내가 죽으려 들지 않아도 죽은 돌이었다. 나 스스로 집을 짓지도 못했고, 어딘가에 연결되지도 않았으니까...
벌써 6개월이란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처럼 어쩌면 나는 다시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금은 달라진 채로... 하지만 내게 있어 2016년 3월의 2주간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점점 멀어져 간다. 애초에 나 자신에게 남기는 노트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는지도 모른다. 편집되지 않은 그대로의 일과 생각을 기록하고자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재편집되고 각색이 된 일기가 되어 갈 것 같다. 하긴 어차피 이건 송북이니까...
방황 & 멀리 있는 빛 (by 김영동): 4분 49초+8분 38초
작곡: 김영동
시: 김영태 (멀리 있는 빛)
1987년 발매된 '먼 길'의 첫 번째와 두 번째 트랙
마치 한 곡처럼 이어져서, 그리고 그만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였기에 2곡을 같이 골랐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힐링 음악, 명상음악이라고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가?'하는 의아함이 생기지만 생각해 보니 꽤 오래되었다.
김영동의 음반 중에 '선'이라고 불교명상음악 앨범이 있긴 하다.
고등학교 방송반 시절에 친구가 김영동의 음악을 오프닝 시그널로 줄기차게 밀었는데, 이보다 먼저 나온 김영동 작곡집의 '초원'이란 곡이다. 우리 딴에는 폴 모리 오케스트라, 스위트 피플보다 낫다고 이런 음악을 많이 소개해야 한다고 했었다.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 국악을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KBS 국악 교향악단의 정기 공연에도 가곤 했었으니까. 나로서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게 좋았다. (ㅠㅠ) 그 계기가 김영동 작품집 '단군신화, 매 굿'를 듣고 난 후였다. 그런 면에서 그 전의 작품집과 이 앨범은 뉴에이지풍 혹은 퓨전 국악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앨범의 뒷면에 김영태 시가 인쇄되어 있다. 시 원제는 '멀리 있는 무덤'인데, 김수영 시인을 그리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