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혜림 Jan 11. 2021

만약 김혜자씨가 쇼호스트였다면?

정직하게 말하기의 전략


'자극' 은 과연 좋은 전략일까? 나쁜 전략일까?

홈쇼핑은 자극의 고수다.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더 극대화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예쁜 연예인이라도 화장품 방송을 할 때는 조명과 메이크업을 활용해서 더 극적으로 아름다워 보여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은 그 화장품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원래 매콤하고 달짝지근한 떡볶이지만 방송에서는 뭔가 더 음식의 색이 선명해 보이고 위에 올리는 고명부터 담아내는 그릇까지 훨씬 더 먹음직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배가 고프지 않던 소비자들에게도 식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감을 자극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적자면 오조오억개이다. 나는 홈쇼핑이라는 구조에서 17년간 일하며 그런 방법들을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앞으로 기술이 발전해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방송, 촉감을 느낄 수 있는 방송이 된다면 더욱 강렬해질 것이다.

홈쇼핑의 모델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평소 집에서 혼자 먹을 때 거울을 앞에 놓고 보면 의외로 표정이 참 단조롭다. 머릿속으로는 ‘맛있네’라고 생각하더라도 무표정할 때가 많다. 하지만 홈쇼핑에서는 가족 또는 연인과 같은 컨셉이 있고 그 컨셉 안에서 소리나 대사 없이 몇 초 동안에 오직 표정만으로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며 이 음식으로 인해, 또는 이 상품 덕분에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이 상품을 구입해서 가족과 저렇게 먹으면 되겠군’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정해진 방송 시간 안에 상품 구입에 드는 비용보다 상품의 활용도나 상품에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어야 소비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홈쇼핑 속 인물들은 실제보다 더 극대화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많은 양의 음식을 게눈 감추듯 빠르게 먹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이게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오히려 판매 후 반품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상품의 전환율(순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를 들어 쌀 방송을 하는데 돌솥에다 하느냐, 일반 밥솥에다 하느냐를 선택해서 좀 더 고향의 밥맛을 연상시킨다거나, 뚜껑을 열었을 때 약하게 올라오는 수증기를 더 극대화하는 건 가능하다. 물기가 코팅되면서 윤기가 돌기도 한다. 조립형 가구가 좀 더 쉽게 조립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쇼핑호스트는 수없이 연습해서 방송에서 능숙하게 시연하기도 한다. 이 조립은 누구나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즉, 가장 강렬한 한방을 준비하는 쇼호스트는 마치 최고의 연주를 준비하는 피아니스트이다. 최고의 연주를 보여주기 위해 피아니스트는 얼마나 긴 시간을 준비하는가. 그리고 그 최고의 연주가 언제나 마음에 쏙 들게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그 누구도 단 한번 보여준 피아니스트의 최고의 연주를 가짜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 고객에게 진하게 다가갈 원초적 자극을 위해 쇼호스트는 갖은 방법으로 연구와 연습을 한다.

사실 홈쇼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소중한 사람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더 맛있어 보이길 원한다. 심지어 잘 모르는 타인에게도 내가 좀 더 키가 커 보이길 원한다거나 더 멋지게 보이길 원한다. 그러니 홈쇼핑이라는 비즈니스 공간에서 벌어지는 ‘∽처럼 보이기’ 전략은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해서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업체는 점점 자신들의 상품이 더 멋져 보이는 방법을 알게 된다.

쇼핑호스트는 점점 이 상품이 돋보이는 시연이나 멘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상품과 함께 자신이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는가에 익숙해지게 된다.

아름다워 ‘보이고’, 맛있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비즈니스 메이크업 기술에 능해진다.
초보 피디는 선배 피디가 방송을 준비하고 연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 극대화하고 더 임팩트 강한 연출 방법을 배우게 된다. 홈쇼핑에 처음 온 모델은 옆의 노련한 모델을 따라 하면서 배운다. 흔히 사람들이 느끼는 홈쇼핑 스타일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도 이런 점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방법들이 매출을 올리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엄마 김혜자 선생님을 만나 함께 방송하면서 진짜 고수에게는 의외의 한 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국민엄마 김혜자 배우와 안창살 구이, 육수팩 제품을 NS홈쇼핑 론칭 기획 단계부터 꽤 오래 전담할 기회가 있었다.

이제 홈쇼핑에서 연예인 브랜드를 내 건 상품은 너무 흔하다.

직접 제조에 관여하는 연예인부터 브랜드 모델만 하는 연예인, 자신이 하는 음식점의 메뉴를 홈쇼핑 상품으로 제품화한 연예인까지 다양하다. 그만큼 소비자들로 하여금 짧은 시간에 상품을 인지시키고 호감으로 끌어내는 데 수월한 마케팅이 연예인 마케팅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동안 연예인 전담 상품들을 수없이 진행하면서 효과를 극대화하고 제품과 연예인의 호감 이미지를 연결해 판매에 도움이 되게 하는 자극적인 기술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극의 기술을 알려주면 대부분의 연예인은 무릎을 치며 수긍했다.

그런데 김혜자 안창살구이 첫 방송을 준비하면서 생각지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첫 만남부터 김혜자 선생님이 ‘난 진실만 이야기하겠다’고 강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내가 이 제품을 하나씩 자르고 숙성하고 포장해서 파는 게 아닌데 마치 내가 만든 것처럼 팔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홈쇼핑에서 연예인이 나올 때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연예인이 직접 그 음식을 음식점에서 판매하고 있거나 제조공장이나 기술력 부분에 관여한 경우이다. 두 번째는 브랜드의 모델로 활동하거나 제품의 1차 소비자가 되어 홍보대사처럼 제품력을 자랑해주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가족 중 누군가가 하는 사업이라 자신의 이미지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경우다.

김혜자 선생님은 사실 마지막 이유였다. 아들이 음식 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로서 나서게 된 것이다. 한평생 연기만 하느라 가족을 많이 못 챙긴 미안함이 있다 보니 아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출연을 결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요리 전문가처럼 양념의 황금 배합 비율을 직접 만드는 콘셉트는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제품과 김혜자를 동질화하고 싶지 않고, 제품의 모델이나 홍보대사가 될 자신도 없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셨다. 아니, 가능하면 그냥 영원한 배우로만 살고 싶다고 하셨다. 그런데 아들이 부탁을 하니 내가 애 클때 연기하느라 바빠서 엄마로 해준 것도 없고 미안하니 안 해줄 수도 없어서 나왔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콘셉트도 필요없고 배우이자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직함만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셨고, 나는 이번 방송만큼은 그동안의 홈쇼핑 방송과 다르게 진짜 김혜자 선생님의 모습을 정직하게 전달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첫 방송부터 깜짝 놀랄 멘트가 줄줄이 나왔다. 원래 시나리오 없는 홈쇼핑 방송이라 예상은 했지만.

엄마의 입장에서 아들이 만드는 안창살 구이의 품질에 대해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 그래서 제조하는 아들에게도 공장을 방문한 뒤 불안한 마음에 끊임없이 잔소리했다는 이야기, 자식들이 엄마의 이름으로 선보이는 음식이라 오히려 엄마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는 솔직한 이야기가 나왔다. 배우라는 세계에서 워킹맘으로 생활하면서 가족들에게 직접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다 보니 홈쇼핑도 내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오게 됐다는 속내까지 이야기하셨다. 요리는 잘 못하지만 이건 이렇게 편하게 먹어요. 정도?

상품 판매 방송인데도 ‘제품이 이래서 좋다!’가 아니라 정직하고 담백한 그녀의 생각이 주를 이뤘다. 제품을 앞세우고 국민엄마 이미지를 내세워서 음식과 요리에 눈을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품은 조금 뒤로 놓고 선생님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로 귀를 집중시키는 방송이었다. 기존의 홈쇼핑다운 모습이 아니다 보니 처음 방송을 본 관계자들은 기함했다. 자신 없다는 식의 멘트나 아들이 걱정돼서 나오긴 했는데 사실은 연기만 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 엄마이다 보니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됐지만 출연여부를 두고 마지막까지 아들과 싸웠다는 투박하고 세련되지 않은 이야기에 다들 놀랐다. ‘홈쇼핑에서 저런 이야기를 해도 돼?’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방송 후반이 되면서 홈쇼핑이 아니라 김혜자 선생님의 토크쇼를 보는 것 같다는 소감과 함께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고 오히려 콜이 오르면서 대박이 났다. 전국 엄마들의 대공감이 느껴졌다. 2차 방송도 매진, 3차 방송도 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그 당시 다른 식품 방송의 매출과 비교해서도 엄청난 성공이었다. 그 당시 종편 프로그램에서도 우리의 홈쇼핑 방송을 취재할 만큼. 처음엔 왜 그런 멘트를 하냐고 타박을 주던 관계자들도 연속 매진 행진을 하자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그런 이야기를 왜 방송에서 하세요~!!' 부끄러워하던 아드님까지도 나중엔 엄마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냈다.

나도 예전에 비슷하게 방송에서 가족 이야기를 했지만 이렇게까지 진심을 다 보여주진 못했던 것 같다. 가족을 보여줘도 예쁜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담아내도 잡지 속 가족들처럼 아름다워 보이길 바랐다. 하지만 김혜자 선생님과 함께 방송하면서 진정성은 오히려 화려하지 않기에 빛난다는 것을 배웠다. 특별한 것, 강렬한, 익숙한 자극이 아닌 자극없는 린넨소재의 옷에 자꾸 손이 가는 것 같은 소탈함으로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친근함으로 상품과 나를 보여주는 모습을 배웠고 그런 감정을 보여주면서도 빛나는 김혜자 선생님이 참 멋졌다.


만약 김혜자 쇼호스트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녀의 홈쇼핑 방송을 정말 사랑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만의 채널에서 어떤 전략으로 다가가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