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캠이 찍은 나의 두 시간

by 굴러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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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오후,

혜화의 작은 연습실에 앉아 있다.
내 앞 책상 위에는 선물로 받은 액션캠이 놓여 있다.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나를 찍어본다.

카메라 테스트 겸 연습실을 잡아 연기영상을 촬영한다.



요즘

연기 워크숍을 이곳저곳 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정식으로 연기학원 수업을 듣기로 했다. 사실 나한테는 꽤 큰 결정이다.

그동안 나는 딱 한 명의 선생님께만 레슨을 받아왔고, 그 수업도 안 들은 지 1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혼자 워크숍 찾아다니고, 혼자 연습하고, 혼자 준비하다 보니 내 문제점이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셀프 모니터링이 너무 어렵다. 연습 영상을 수십 개 찍어놨지만,

그걸 끝까지 다시 보는 건 늘 고역이다.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고, 지쳐버린다.

그러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학원 등록을 했다.


상담 후, 당일결제를 해야 할인가로 등록이 가능하다는 말에 3개월치 학원비를 일시불로 긁어버렸다.

내 안에 커다란 무언가가 쑹-덩 빠져나간 기분.

다음주 수업을 기약하며 감독님이 숙제를 내주셨다.


- “다음 시간까지 이 독백을 본인만의 해석으로 준비해 오세요.”


그리고 직접 쓰신 창작 독백 대본을 PDF 파일로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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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같았으면,

집에 오는 길에 중얼거리며 대충 내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굳혀 그대로 연습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오랜만에 큰 금액을 지불하고 나니 저절로 각성이 된다. 이번은 달라야해.)

최근 워크숍에서 배운 걸 써먹고 싶었다.



나는 먼저

대본을 노트에 그대로 적었다. 문장부호를 다 빼고, 띄어쓰기도 무시하고, 글자만 빽빽하게. 그리고 그 글자를 무감정 상태로 읽기 시작했다. 줄줄줄— 순전히 암기만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어조나 감정이 생기면, 다시 처음부터. 한 줄, 두 줄, 외우다가 막히면 다시 처음부터.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나는 맥락으로 흐름을 빌려 외워야 그나마 잘 외우는 편인데, 그러면 감정이 따라온다.

편하게 고수하던 방식과 반대로 하려니 로봇처럼 무한반복해서 읽는 이 과정이 의심스러웠다.

그렇게 수십번 기계처럼 읊다보니 신기한 순간이 생겼다.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 같은 대사들.


'이게 외워진다고..?' 하는 의심들이

'이게 되네...?'로 바뀐다.


점점 신이나고 탄력을 받는다.

그리고 놀라운 건, 이 방법이 내 고질적인 문제를 잡아줬다는 점이다.



그동안 나는 맥락으로 외우다 보니 대사를 그대로 뱉는법이 없었다.

어미가 바뀌거나, 순서가 뒤바뀌거나, 심하면 즉석에서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그게 자연스러운 연기인 줄 착각했다. 그런데 오디션에 가면 늘 같은 말을 들었다.


- “이정 씨, 지금 대본 그대로 읽은 문장이 하나도 없는 거 아시죠?”


지금 돌아보면, 참 거만했다.


' 아 , 작가님들이 고르고 골라 적은 글자 하나하나를 내가 무시했구나.'


잘못됐음을 느꼈다.


근데 방금 내가 한 '무(無)하게 읽기' 는 텍스트만 완벽히 배껴 암기한 상태에서

감정을 입히는 순서이기 때문에 대사를 멋대로 바꾸는 대참사는 이제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레카-)




암기를 끝내고 나서는 무미건조했던 문장에 색을 입혔다.

빨강, 노랑, 하양, 검정… 다양한 감정으로 실험했다. 물론 이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빨리 완성하고, 빨리 오디션을 넣고 싶은 마음이 늘 앞선다.

하지만 이 과정은 오래, 다양하게, 나를 시험하며 훈련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해보려 한다.






학원 등록을 마치고 나오는 길, 기분이 묘했다.


스무 살 초반, “나 연기할 거야”라며 발품 팔아 알아본 학원에 알바비를 모아 등록하던 날의 벅참과 설렘은 없었다. 꿈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 감격도 없었다. 오히려 과거의 나를 떠올리며 씁쓸했다.

마치 돌아오고 싶지 않은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시 출발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무인도에 갇혀 누군가 주사위를 굴려 나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 발로 나와서, 내 처지를 인정하고, 털고, 또 걸어가는 게 훨씬 낫지. 또 힘을 내본다.


오늘 액션캠에는 두시간이 담겼지만

그렇게 두시간, 세시간 쌓여져가는 시간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는걸 잊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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