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녹색] 하나에 삼천 원짜리 펜

by 굴러가유

사치스러운 편은 아니다.

구멍 난 양말도 몇 번이고 꿰어 신고, 꼭 어디선가 멀쩡한 물건을 받아오는 엄마의 가르침에 따라

알뜰살뜰 살며 어릴 적에는 스스로 현모양처감이라고 뿌듯해하기도 했다.


남들은 비싼 거 오래, 여러 번 쓰면 이득이지 않냐 하지만

이왕이면 저렴한 거 오래, 여러 번 쓰는 게 훨씬 이득이지 않은가?


그러던 내가 꾸준히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바로 '펜'이다.


그냥 펜이 아니다.

'Get closer to the book'이라는 글씨가 고급지게 적혀있고

펜 심은 0.5 정도의 두께이며 부드럽게 잉크가 그려지는 진녹색 펜이다.


이 펜을 처음 마주하게 된 건 망원에 있는 책방에 방문했을 때이다.

한때 '망원'이라는 동네에 흠-뻑 빠져 나지막하고 조용한 우드향의 카페들을

주 2-3회씩 도장 깨기 하던 때였다.

그중 '당인리 책 발전소'라는 이름도 특이한 북카페를 발견했다.

2층은 독서하기 좋은 카페가 있고 1층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과 문구류를 판매하고 있었다.


말했다시피 허리띠를 졸라매는 습관이 있던 터라

책은 이런 오프라인보다 할인이 들어가는 온라인 서점을 자주 이용했기에

첫 방문에 덜컥 책 한 권을 사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좀 더 저렴하면서 이곳의 첫 방문을 기념할만한 건 없나-'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중 발견한 게 이 펜이었다.

무려 삼천 원.

어릴 적 삼색볼펜도 삼천 원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고작 단색볼펜 하나가 삼천 원이라니.

그 앞에서 샘플 펜을 딸깍 딸깍 거리기를 수십 번,

기나긴 망설임 끝에 진녹색 펜하나를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일반 녹색보다 더 차분하고 진중한 면이 있는 것 같으면서

고급지고 멋들어진 '진녹색'.

검은색은 흔하고 임팩트가 없어 아쉽지만

어두운 진녹색은 검은색을 대체해 줄 만큼 보편적이고 안정적이기까지 하다.

펜을 들고 다이어리에 끄적여보았다.

부드러운 필기감에 특히나 마음에 드는 이 컬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로 황토색, 남색, 회색, 라임색

진녹색 펜이 다 닳아 새로 사러 갈 때면 항상 진녹색에 더해 또 다른 컬러를 골라 구매하곤 했다.


리필심도 없는 진녹색.. 두 개 사면 육천 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나오지만

왠지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본다.


마음에도 총량이 있어서

다른 물건에는 애착과 욕심이 없다가도

내가 특히나 애정을 쏟는 것에는 아낌없이 투자해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구나.


마음들이기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 흠뻑 사랑을 줄 여력을 남기려면

다른 것에는 무심하게 고개 돌릴 줄 알아야 한다.


그 후로 돈 쓰는 게 무섭지 않다.

'나는 이 물건엔 그렇게 애정이 없지.'

남들은 좋다고 여기저기 홍보하고 올라오는 sns 글에도 단단해질 수 있는 힘.

'이번에는 어떤 걸 마음에 들여볼까?'

그 힘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도와준다.


누군가가 애장품을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기만 하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