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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 돋기를 기다리며

소식지 구르다 2025, 곡우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12

: 이규보 李奎報








이규보는 <운봉(雲峯)에 사는 노규선사(老珪禪師)가 조아차(早芽茶)를 얻어 나에게 보이며 유다(孺茶)라 이름을 지어 붙이고는 시를 청하기에 짓다>라는 제목으로 시를 썼다. 줄여서 <유다시(孺茶詩)>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인간이 온갖 맛 일찍 맛봄이 귀중하니

하늘이 사람 위해 절기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무르익음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괴상한 일인데

근래 습속은 기괴함을 좋아하니

하늘도 인정(人情)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시냇가 찻잎 이른 봄에 싹트게 하여

황금 노란 움 눈 속에 자라났네

남방 사람 맹수도 겁내지 않아

험난함 무릅쓰고 칡덩굴 휘어잡고

간신히 채취하여 불에 쬐고 말려서

남보다 앞서 임금님께 드리려 하네


손에 닿자 향기가 코를 찌르는구려

이글이글 풍로 불에 손수 달여

꽃무늬 자기에 따라 색깔을 자랑하누나

입에 닿자 달콤하고 부드러워

어린아이의 젖 냄새 비슷하구나


부귀한 가문에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우리 선사 이를 얻음이 괴상하구려

남방 사람들 선사의 처소 알지 못하니

찾아가 맛보고 싶은들 어이 이를쏜가

이는 아마도 깊은 구중궁궐에서

높은 선사 대우하여 예물로 보냄이겠지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고 간직하다가

임금의 봉물 중사(中使) 시켜 보내왔다네

세상살이 모르는 쓸모없는 나그네가

더구나 좋은 산수까지 감상하였네

평생을 불우하여 만년을 탄식했는데

일품을 감상함은 오직 이것뿐일세


귀중한 유다 마시고 어이 사례 없을쏜가

공에게 맛있는 봄 술을 빚기를 권하노니

차 들고 술 마시며 평생을 보내면서

오락가락하며 풍류놀이 시작해 보세.”




고려 사람 이규보는 차를 좋아했는데 그가 남긴 많은 차시들 가운데에는 유머와 넉살이 섞인 것이 많다. 맛있는 찻잎 보내주심을 감사하며 사례로 봄 술 빚기를 늙은 선사에게 권하는 오만 방탕함 같은 것들은 언제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 오늘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저 시는 나라에서 존경받던 노스님에게 선물 받은 차를 감사하며 적은 것인데 그 시작이 무척 재밌다.




“인간이 온갖 맛 일찍 맛봄이 귀중하니

하늘이 사람 위해 절기를 바꾸네

봄에 자라고 가을에 무르익음이 당연한 이치이니

이에 어긋나면 괴상한 일인데

근래 습속은 기괴함을 좋아하니

하늘도 인정(人情)의 즐겨함을 따르는구나”




봄에 싹이 트고 여름이면 무르익어 가을이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인간의 이치임을 세상이 모두 아는데, 차는 유독 그 법칙을 빗겨나감을 유머 있게 적었다. 여기서 온갖 맛이라 표현한 것은 비유적으로 차를 뜻한다. 표면 그대로 인간이 오미(五味)를 다양하게 맛봄은 곧 사회적 성공, 일신의 풍요가 없다면 누리기 힘든 호사다. 21세기 사는 우리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모두 십 오미도 누릴 수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다양한 맛을 한 번에 맛봄은 꿈에서나 가능한 호사였다.


표면적인 의미를 벗겨내면 뜻은 더욱 깊어진다. 설사 일신의 풍요를 누릴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노승(老僧)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데, 오미는 곧 탐미(耽味)이기 때문이다. 집착에 이르는 하이패스 고속도로 같은 것으로 여겼기에 다채로운 맛과 풍미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수행자의 고집이기도 하다. 그럴 때 승려들이 사용한 것이 차였다. 진실 여부와는 별개로, 예로부터 머나먼 우리 차인 선배들은 차란 그 자체로 오미와 통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한 가지의 풀잎으로 만 가지의 재료를 담아내니, 음식을 탐하지 말고, 오직 차 한 잔으로 만족함을 가르쳤다. 아마도 맛 그 자체의 물리적 유효 범위 따위를 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미적인 만족을 이르는 것이니,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나 은유적으로나 둘 다 통할 수 있는 재밌는 표현이다.



해마다 곡우 무렵이 되면 차 만들 준비를 하는데 올해는 유독 날씨가 괴이하다. 삼월 말에서 사월로 넘어갈 무렵에는 날이 더워 못 해도 일주일, 어쩌면 보름은 일찍 일을 시작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사월 둘째 주에 들어서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말 그대로 꽃을 시샘하는 수준을 넘어 저주하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북녘에는 더러 눈도 내렸다. 하동 화갯골 자락에서 삐죽 올라오던 차나무 새 줄기에 매달린 초록 잎사귀들이 모두 얼어서 갈색으로 변해버렸다. 몇 해에 걸쳐 이따금 날씨가 변덕을 부리곤 했다. 어떤 해에는 냉해로, 어떤 해에는 가뭄으로 찻잎이 고르지 못할 때도 있었다. 올해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뜨겁고, 차갑고, 가문 일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니 제아무리 차나무라도 고고함에 불현듯 처연함이 묻어난다.


인간이 차를 마시지 않아 탐욕에 찌드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늘이 절기의 이치를 바꾼 것인지, 아니면 하늘이 애초부터 의도하여 만들어낸 미미(美味)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이른 봄 녘에 만들어지는 것이 차였다. 그러다 보니 옛사람들은 더 이른 때에, 더 작은 이파리로 차를 만들어 마시기를 좋아했고, 아기의 손톱만큼 작은 찻잎도 솥 위에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은 너무한 것 아닌가. 지금 이 계절의 요상한 기운이 정녕 하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지금 우리가 받는 것이니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며 하늘에 제사라도 지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간절한 것은 다음 주에는 아기 새끼손가락만큼 자란 세작 차 이파리들이 쏟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2025년 4월 20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폭풍 구름과 무지개로 표현된 엠블럼 : 잔인함 속에도 자비가 있으니

"Tinted drawing of Book 2, Emblem X: Cum severitate lenitas (Severity with Mercy) represented by a storm cloud and a rainbow. Image taken from f. 17v of Three books of emblems, prefaced by a letter from Henry Peacham addressed to 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 and based on the Basilikon Doron (Royal Gift), James I's book of advice to his son and heir. Written in Latin, Greek, English."


https://itoldya420.getarchive.net/media/book-2-emblem-x-cum-severitate-lenitas-even-in-harashness-there-is-mercy-from-0c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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