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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가와 바라밀 下

소식지 구르다 2025, 추분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20








(지난 편에 이어서)


석가모니는 깨끗한 물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한다. 불경에는 깨끗한 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은유가 많은데, 때문인지 이를 대표적인 공양물로 삼게 된 것도 이해가 간다. 무엇보다 이 알가가 상징하는 바가 참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저 이야기에서 내가 느끼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석가모니가 제자를 가르치는 방식의 자유로움이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에서 죽음까지의 서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대단히 일관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는 제자들에게 한결같이 개체로서의 자각을 강조했다. 쉽게 말해 깨달음은 남이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처음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완성했을 때 선정에 들어 했던 첫 번째 일은 해탈과 깨달음은 정말로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 것이었다. 방급 깨달은 자가 한 일치고는 꽤 역설적인데 이 부분 때문에 나는 석가모니의 이야기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계시를 받은 메시아도 아니고, 신적 권능을 하사받아 몸에 두는 초인도 아닌 오직 몇 번이고 생과 사를 반복하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윤회해 온 자만이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랄까. 석가모니의 이 생각을 눈치챈 산천의 신들은 그가 세상의 어리석음에 실망해 법을 펼치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를 설득하는데 대표였던 범천이 나서 그를 세 번 설득했고 이때 석가모니는 명상에 들어 연못 속의 연꽃들을 보았다. 연꽃들은 모두가 진흙탕 안에서 발아했지만, 어떤 것은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하고, 어떤 것은 표면 가까이 올라와 겨우 볕을 쐬고는 죽으며, 또 어떤 것은 드물지만 표면을 뚫고 한참을 올라와 광명을 평생 누리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공평함 안에서도 사람은 잘 이해하는 자와 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가 따로 나뉘니 그것이 곧 인간의 숙명이라는 점이다. 우스꽝스러운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불교의 가르침은 그러니까 개인플레이에 가깝다. 법의 광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 얼마나 가까이 갈지는 석가모니조차 선택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이 아니고 마음을 닫은 자의 마음을 여는 것은 그의 일도 아니다.



깨끗한 물을 구하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야기에서 얻은 내 두 번째 생각이다. 내가 만약 가난하고, 불우하기까지 한 인간이라면 나에게는 신의 은총이 깃들지 않는가. 공양물 하나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비참한 인생이라면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빛나는 다른 누군가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인생이라도 선택은 존재하고 그 폭이 넓지 못하더라도 결정하는 것은 나의 문제다. 그렇다면 나는 신에게 무엇을 바칠 수 있을까. 돈이 없으니, 향을 올릴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이 모자라 집안의 새끼들을 죄다 굶게 만들면서 사원에 바치는 곡식은 악신이 아닌 이상 그분도 기꺼워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나는 깊은 산속의 물을 찾아 사흘에 걸쳐 이물질들이 가라앉아 깨끗한 물이 되도록 기다리고, 그 사흘을 걸으며 산과 들에서 떨어진 꽃들만을 모아 화관(花冠)을 만들었다. 사흘 동안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인간이 되고자 깨끗하게 씻고 깨끗하게 먹고, 깨끗한 말만 했으며, 깨끗한 생각만 하도록 노력했다. 여기서 생각해 보자. 정말로 깨끗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깨끗한 자인가.



알가는 그 자체로 최고의 공양물이다. 기복(祈福)을 위한 교환물 혹은 정성의 물질적 표현으로는 실격일지 몰라도 신이 있고 그것이 생전의 석가모니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면 재산 일부분을 재화로 교환하려고 시도하는 자보다 가진 것 없는 자가 자신의 유일한 가치인 시간과 노력으로 준비한 공양물을 더욱 아름답다고 여길 것이다. 시간은 속력이 아니라 속도라서 방향성을 가진다.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종교 아니었던가. 앞서 말한 <대일경>에서는 진언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암송하라 가르친다.



“以本淸淨水 洗浴無垢身 不捨本誓故 證誠我承事.”



이를 얼기설기 해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청정수를 근본으로 삼아 육신의 더러움이 없도록 깨끗이 씻어내어, 본디 한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니 내가 정성을 들여 부처의 뜻을 잇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백일 간 해야 한다는 진언기도의 구절인데, 초의의 저 차시(茶詩)의 말과 같은 뜻이다. 그는 알가에는 참된 본체가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인즉 가짜도 있고 진짜도 있다는 뜻이니 가짜는 그저 공양물로 위장한 대가성 재화고 우리는 이를 욕심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참된 본체는 다른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록 아무것도 아닌 물 한 사발이지만 이것이 부처님이 드셔도 괜찮을 깨끗한 물이 되기 위해 바친 나의 노력을 뜻하겠다. 물 한 사발을 위해 내 몸과 마음을 모두 깨끗하게 노력했으니, 그것이 신 앞에 선 나의 맹세고, 부처의 뜻을 이어 내 삶 안에 구현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참된 본체를 발견하게 되면 비로소 바라밀에 다가설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번 생에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까지 닿을 수 있을까. 걸어서 지구 한 바퀴를 도는데 족히 십수 년의 세월이 걸린다는데 저 언덕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아니. 애초에 전제 자체가 틀렸다. 저 언덕에 가기 위한 조건이 알가를 먼저 마음에 품고 마시고, 내 삶 안에 녹여 준비하는 자세다. 차 한 잔 마시는 데 필요한 조건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에 불평하지 마시라. 길게 보면 그것이 곧 복이 될 테니.







2025년 9월 23일,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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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Joseph Stella (Italian-American, 1877-1946), 'Tree of My Life', 1919

https://artbridgesfoundation.org/artworks/stella-tree-of-my-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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