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소설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23
17세기 일본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에도는 스키(数寄)하기 좋은 곳이다.”
스키란 다도나 풍류 따위를 즐기고 향유하는 자세나 태도를 뜻한다. 재미있는 것은 저 글자 그 자체인데, 스(数)란 셈을 뜻하는 것도 있지만, 약간이나 어느 정도라는 뜻도 있고, 무엇보다 뒤에 붙은 寄에서 위 부수를 하나 빼면 ‘数奇’가 되어 운명이나 운수 따위를 뜻하게 된다. 원래 寄는 奇와 혼용하여 사용되기도 했는데, 奇는 쟁기 위에 사람이 올라간 모양에서 출발한 글자로 기특하다는 뜻과 진귀하고 이상하다는 뜻도 있다. 쟁기 위에 사람이 올라간 모습이 기이하고 이상할 수도 있고, 단순히 쟁기와 사람을 같이 묶어서 생각하면 일하는 모습이니 그것이 기특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부수인 ‘宀’가 집을 뜻하니 寄는 이러한 기특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것이 집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이 글자는 원래 임시로 얹혀산다는 뜻을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시간이 흘러 맡기거나 위임하거나 의지한다는 뜻으로 확장했다. 기특하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존재가 집 안에 들어왔으니, 처음에는 불안하기도 하고 의심쩍기도 했지만, 이윽고 자연스레 순응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 기이함이 득이 되어 오히려 의지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각해 보자면 이러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마음, 이리저리 복잡하고 다양한 기분이나 상태의 합을 어느 정도 셈하고 다스리고 이해해 보는 시간이나 경험이 곧 数寄다. 그리고 차를 바라보는 그들의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으니 꽤 근사하고 멋진 단어다. 그러나 근사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차인들은 寄가 자신들의 차와 그에 묶인 정신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정신성이랄까 그들을 한데 묶어 주는 아름다움의 결이랄까. 그들이 사랑하고, 때로는 숭상하고, 싸웠다가 어떤 때는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는 아름다움의 한 형태다.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이에 동의하는 이들을 한 데 묶는 힘이 있다. 아무런 유형의 형태나 이득 따위가 없어도 아름다움에 공명하는 이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동질성을 스스로 발견하며 심할 때는 소속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름다움의 형태는 생에서 죽음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그중에서 寄 역시 한몫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저리 복잡하고 얽혀 있으되 분명한 이로움의 상태, 그것이 寄다. 음양에서 이 단어의 근원이 되는 奇는 홀수이자 양의 상태를 뜻한다. 옛날에는 홀수를 길한 것으로, 짝수를 흉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奇는 장소 면에서는 위(上), 앞(前), 높음(高)을 뜻했고, 인사(人事) 면에서 귀한 것, 존귀한 것, 길한 것, 복스러운 것을 뜻했다. 따져보면 이러한 귀하고 좋은 것들이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기이한 현상이 곧 寄니, 그것이 다도다. 하지만 단순히 좋은 것의 덩어리가 아니다. 이러한 플러스의 정체성은 역설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복잡하여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가 없다. 기이한 것들 다수의 모임(数寄)이 곧 ‘스키’니 이는 아름답고 득이 되는데, 정리되지 않은 다소의 혼란한 상태다. 이것이 일본의 다도를 한데 묶는 미적 가치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란 뒤집어 말하면 앞으로 정리될 상태를 뜻한다. 차는 인간의 일이고, 인간이 다스리는 삼생(三生)의 문제를 푸는 실마리라 보았기 때문에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이러한 자세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차인의 일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전제된 것은 우리는 인간으로 언제나 부족함에 시달린다는 것이고, 이를 돌파할 무기는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가능성이다. 굳이 과거를 들추어 미래로 향하고자 하는 이 번잡스러움의 행위와 과정은 모두 조금 더 괜찮았으면 하는 미래에 관한 가능성에 점철되어 있다.
정제되어 있지 않았으면 정제할 수 있다. 완벽하게 정리된 것이 아니라면 정리할 수 있다. 여전히 내가 할 것이 남아 있다면 좋겠다는 이 발상은 유아적이지만 동시에 우리 인간을 통찰하는 하나의 정의이기도 하다. 우리 집 둘째가 걸린 ‘내가내가병’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 모든 일에 본인이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 낫지 않는 병이다. 나의 손이 닿지 않으면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이 발상으로 문명은 여기까지 왔고, 동시에 온전히 손길이 미치지 못했기에 우리는 여전히 천 년 전, 이 천 년 전의 사람들에 비해 제자리걸음이다. 数寄가 추구하는 것은 이러한 가능성에 주목하고, 정제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여정인 셈이다. 센 리큐는 십수 명의 내로라하는 제자들을 두고도 절대 하지 않은 말을 마흔이 넘어 들어온 늦깎이 제자 후루타 오리베에게만 남겼다. “너는 남들이 하지 않은 일을 하라.” 오리베는 스승의 이 말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철저한 미의식의 근원으로 삼았는데, 이는 별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남들이 모두 센 리큐의 그림자 안에서 안식을 취할 때 본인은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센 리큐가 모든 것을 완성하고 정리했다는 착각에서 자유로운 차인은 당대에 센 리큐 스스로와 제자 오리베 둘 뿐이었던 셈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20세기에 들어 센 리큐의 망령에 찌들어 죽은 아이 불알 만지기 하던 당대의 차 경향을 강하게 비판했다.
홀수가 왜 더 좋은 숫자라고 생각했을까를 참 오래도록 생각했었다. 삼(三)이 왜 완전성을 뜻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불완전함이 완전에 이르는 과정이 이 안에 잘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의 위대함이 태어나고, 이 위대함의 영향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나는 다음이 있다면 그를 바탕으로 태어나는 온전히 벗어난 것도, 온전히 새로운 것도, 그렇지만 같지도 않아 온전히 새로운 것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새로운 미래가 곧 홀수인 셈이다. 불완전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완전함이 될 것이라는 가능성이 잘 녹아 있기 때문이라는 의식을 잘 붙잡고 살다 보면 나도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경험의 세계를 통찰하고 아름다움을 관찰할 수 있게 되지 않을는지.
2025년 11월 22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René Magritte (Belgian, 1898-1967): The Art of Conversation (L'Art de la Conversation), 1963. Oil on canvas, 46 x 38 cm. Private Collection. © VEGAP, Madrid.
https://www.wikiart.org/en/rene-magri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