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가 내게 하는 말, 하나

소식지 구르다, 대한 편

by 구르다

차와 사람과 이야기 27 : 센 리큐 千利休











稽古とは一より習ひ十を知り 十よりかへるもとのその一

“연습이란 하나부터 배우는 것이 열 개를 알고 열 개를 얻는 근원이 된다.”



茶の湯をば 心に染めて眼にかけず耳をひそめてきくこともなし

“다도를 닦으면 마음을 기울이므로 눈에 띄지 않고 귀를 기울여 듣는 일도 없다.”



-「利休百首」 中





센 리큐는 일본 중세 16세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두 섬긴 차인이었고, 어려서부터 다도에 재능을 보여 일찍이 명성을 날렸다. 그는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 천하삼종장 중 으뜸이 되어 히데요시의 정치와 권위를 차라는 도구를 통해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차인이 걸어야 하는 삶의 방향성이 권력에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을 경계했고, 결국 히데요시의 손에 죽었다. <리큐에게 물어라>라는 책에서 작가는 센 리큐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오직 아름다움 앞에서만 머리를 숙입니다.”




요는 히데요시의 차는 아름답지 않다는 뜻이다. 굴복이 아니라 할복을 택할 정도로 추했던 셈이다. 오사카성에 황금을 뒤덮은 차실을 만들고 자랑할 때 리큐는 눈살을 찌푸렸다. 히데요시는 리큐의 할복 이후 대덕사 산문 2층에 모셔 놓은 리큐 목상을 효수했다. 대덕사를 오가는 모든 이들이 리큐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야 한다는 핑계였다. 리큐가 히데요시의 차를 추하다고 여긴 이유는 단순히 황금 따위의 장식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황금이 대변하는 세상 모든 간편하고, 단순함에 길든 태도가 삶이란 단어를 수식하기에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화려함, 값비싼 재료가 주는 놀라움이 아름다움의 한 측면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는 센 리큐의 정신을 들어 ‘차는 아름다움의 종교’라고 말했는데, 종교(宗敎)란 말 그대로 배울 가치가 있는 가장 숭엄하고 높은 것이다. 인류 역사를 들어 인간이 인생에 단 한 가지만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일 것이란 생각에서 만들어진 글자다.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그저 사치스러운 것에 몽땅 절여질 필요는 없지 않겠나. 배우고 따를 가치가 있어야 한다.



리큐가 생각하기로 차에서 배울 것이란 시각적인 화려함이나 값비싼 도구를 사용해 상대를 기죽이거나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 따위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차는 오직 나를 높이와 깊이 모든 면에서 성장시키는 연습의 도구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차라고 불러도 괜찮고, 수행이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연습이란 성실의 다른 말이고, 일상의 동의어다. 반복과 같은 말이고, 진실의 유의어다. 오직 하나에서 출발하는 연습이어야만 의미 있는 二에 도달하고, 삼의 경계를 넘볼 수 있다. 그 길이 아니라면 어떻게 가도 완성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어찌 육이나 칠 정도에 가 닿기도 하고, 운이 좋고 재능이 출중하다면 팔이나 구에 근접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완성하지는 못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행 없이 일구는 자세가 결국 완전함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를 온전하게 남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내는 차여야만 마음을 기울였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미련이 남지 않고 후회도 없다. 남을 것이 없어서 아쉽지 않고 욕심을 부리거나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 일도 없다. 내가 만족하고 남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니 쓸데없이 눈 밖에 날 일이 없다. 그저 무사하고 평온하다. 그런 인간은 팔랑거리는 귀로 시정잡배처럼 이리저리 오갈 일도 없을 것이다.



「利休百首」는 그가 말년에 제자들을 위해서 쓴 글이다. 제자들은 항상 리큐에게 차를, 도를 물었는데, 그때마다 기본적인 것들을 대답하기 일쑤였다. 제자들은 그러면 곧장 실망하고는 투덜거리기에 바빴는데 못난 몇몇은 버릇없이 되묻기도 했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리큐는 대답한다. “그러면 네가 한번 해 보거라. 만약 네가 온전하게 해낼 줄 안다면 오늘부터 내가 너를 스승으로 모실 것이다.” 정치적 야심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히데요시에게 차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포장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리큐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가 위대한 이유는 스스로 믿고 세운 원칙이 있다면 불합리로 세운 굴종의 강요 앞에 당당했던 까닭이다. 주자(朱子)의 말대로 공부(工夫)가 안(內)과 밖(外)을 모두 닦음의 합이라면 아름다움이란 그것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2026년 1월 20일,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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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

Brice Marden, "Grove IV," 1976

https://www.guggenheim.org/artwork/2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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