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6, 입춘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28 : 센 리큐 千利休
茶はさびて心はあつくもてなせよ 道具はいつも有合【ありあひ】にせよ
“차는 사비스럽게 마음은 넉넉하게 대접하라 도구는 언제나 갖추어라.”
-「利休百首」 中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어리석다. 물건이라고 물었으니, 부모님의 마음이나 연인 간의 사랑, 스승의 가르침 같은 형태 없는 것들은 모두 제외해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사고팔고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의 물건들이 떠오를 텐데 요즘 금값이 금값이라 하니 집채만 한 황금 동상이 그러할까. 아니면 눈알만 한 다이아몬드로 만들었다는 목걸이가 그러할까. 일본의 국보라는 기자에몬이도는 그보다 쌀까 비쌀까. 조금 어처구니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일본 중세의 차인들은 시간이 깃드는 물건에 더 큰 값을 매겼다. 그러면 오늘보다 내일 이 물건이 더 비싸지는 셈인가.
아쉽게도 버티면 값이 오른다는 투기의 개념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값이 오르는 것은 맞지만 그건 우리의 일생 안에 벌어지는 아쉽게도 아니다. 물건이 주인을 바꾸어 가며 몇 생을 보내고 여전히 값어치로서의 생명력이 다하지 않았다면 그 물건에 비하는 동등한 오늘의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누이와 한때 살았던 성북동은 언덕이 많아 위로 올라갈수록 고급 주택이 즐비했다. 모 회장, 어느 처의 사장님 집들이 줄지어 서고 모두가 사람 키의 서너 배는 될법한 높은 담장으로 집을 가리고 있었다. 그 벽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소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빛깔, 껍질의 선명한 질감, 수형의 웅장함, 무엇보다 그 키와 덩치가 주는 위압감이 대단했다. 저 소나무들은 몇몇은 강원도에서 몇몇은 충청도나 경상도에서 넘어왔을 텐데 나이가 백 년 아래 된 것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 백 년 묵은 소나무도 어렵지만 몇백만 원을 들이면 옮길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옛사람들에게 백 년 묵은 소나무는 옮길 수 없는 신령스러운 존재였다. 그보다 더 큰 느티나무 같은 것들은 어떨까. 현대 기술로도 옮길 수 없는 그 거대한 나무 속에는 왠지 토토로 같은 신수(神獸)가 살고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런 나무는 옮겨다 심을 수 없다. 요즘은 짝퉁 명품처럼 골동품 위조도 정교해져서 백 년, 이백 년 따위는 전문가의 눈도 속이는 게 가능하다는데 사실 오래된 물건이 값이 나간다는 이 생각은 저 먼 옛날부터 그러했고 모두 이러한 감수성 안에서 생겨난 것이다.
사비(さび)란 물건 안에 깃드는 시간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사람이 조작하고 위조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오직 흐르는 시간은 손댈 수가 없다. 어제 있었던 일은 엎질러진 물이라 주워 담을 수 없기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 훌륭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낸 인간에게서 스며 나오는 것처럼 한세월을 버티고 이겨낸 물건은 여유가 있다. 작고 왜소해도 풍모가 아우라처럼 흐르는 인간처럼 새것의 반짝임이 없어 빛이 바랜 수수한 모습에도 기품이 있다. 센 리큐는 그 이유를 마치 차인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한 잔의 차를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내는 일을 수행하는 이가 차인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완벽에 다가가는 과정인데 이를 수행이라 한다면 차는 그를 위한 도구인 셈이다. 센 리큐가 생각하기로 그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연습이다. 그래서 이전 글에서 그가 피력한 연습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연습은 어떻게 하는가? 많이 해야 한다. 많이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한 번에 몰아서 해치울 수 있는 숙제 같은 개념이 아니므로 결국 일정한 양을 꾸준하게 매일 반복해야 한다. 연습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공연을 준비하는 것과 같다. 너덧 살부터 평생을 건반만 쳐 왔던 피아니스트가, 콩쿠르에서 우승해 휘황찬란한 경력의 정점을 찍은 천재가, 환갑에 이르러 세상 모든 애호가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가가 다음 공연을 위해서 하루에 몇 시간이고 연습한다. 같은 곡만 수천 번을 넘게 쳤음에도 다시 연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다. 완벽이란 실수의 반대말이다. 그 어떠한 실수도 없다면 완벽한 것이다. 다만 실수란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다롭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 단 한 번의 미스도 없이 모두 제때 제 위치의 건반을 눌러 완벽하게 쳐냈다고 찬사 받더라도 자신이 구현하려고 했던 소리가 나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차인의 차도 이와 마찬가지다.
한 잔의 차를 내기 위해 얼마의 시간을 사용할 것인가? 돌려 말하면 당신에게 내놓으려는 저 주인의 차 한 잔 안에는 얼마간의 연습이 녹아 있을까? 단순히 기술의 문제이고 말까? 차를 매일 따르고, 마시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감상을 누리고, 떠오르는 생각을 다스리고, 벌어지는 집중력을 다잡으려 노력했을까. 그렇게 자신의 단점을 받아들이고, 모자란 점을 인정하며 자기를 이해하는 시간을 제대로 보낸 차인의 차가 바로 사비(さび)로운 차다. 그러니 다소 협소하고, 물건이 번지르르하지 못하여도 괜찮다. 차인의 찻그릇은 명함이라 때가 묻고 사용감이 커도 관리가 잘 되어 있다면 이는 훈장과도 같아 존경할 만하다. 그렇게 갖추어진 사비로운 찻자리에 마음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다.
2026년 2월 4일,
정 다 인
당신을 보듬다, 소식지 구르다, rollingtea.net
위 그림
John Constable(1776-1837), Study of the Trunk of an Elm Tree, c.1821
https://collections.vam.ac.uk/item/O16555/study-of-the-trunk-of-oil-painting-constable-john-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