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 구르다 2025, 춘분 편
차와 사람과 이야기 10
: 다케노 조오 武野紹鷗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차인 조오는 자신의 유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스키(すき)하는 자는 버려진 도구를 미다테(みたて)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스키(数奇)하는 자’란 간단히 말하면 차를 가까이에 두고 실천하는 사람, 차인을 뜻한다. 일본어로 좋아하다는 말과 같은 발음이지만 한자도 다르고 뜻도 조금 다르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그래서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라는 점은 같을 테지만 스키(好き)에 비해 스키(数奇)는 조금 더 복잡하다. 마음의 화학반응을 넘어 여기에는 구체적인 행동이 깃든다.
‘스(数)’란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여럿이나 어느 정도의 양을 뜻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란 누군가에게는 많을 수도 있고,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적은 수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 단어에는 운명이나 운수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내가 가진 것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하면 제대로 살기 어렵다는 뜻이었을까.
‘키(奇)’는 홀수라는 뜻도 있고 진귀하고 이상하다는 뜻도 있다. 진귀하건 이상하건 공통점은 의외성이다. 뜻밖의 놀라움이 이 단어 안에 녹아 있다. 특히 일본의 차인들은 이 단어를 좋아했는데, 놀라움과 의외성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거대한 힘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서프라이즈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들은 이 단어에 한 가지 정의를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합해보면 ‘스키’란 꽤 놀랍고, 어느 정도의 훌륭함을 담보하는 행위다. 심심하기 그지없는 돈 많은 부호나 하릴없는 귀족 놀음의 소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스키’는 그런 따분함을 벗겨내는 소일거리 이상이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스키’는 좋아하는 대상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있는 나에게 방점이 찍히기 때문이다. 놀라움을 주고, 번뜩이는 아름다움은 발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오늘도 내일도 몇 년 뒤에도 여전히 모자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이 단어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라. 앞으로 정리될 상태가 될 것이니 이는 가능성에 대한 그들의 고상한 집착이다.
‘미다테(見立て)’란 진단하거나 감정하는 일 따위를 말하는데, 차인들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스키의 의외성을 한껏 살려냈다. 그들은 원래 차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응용해서 쓰게 된 도구를 미다테라고 불렀다. 차를 즐기는 사람 중에 엉뚱하고 기발하게 도구를 제멋에 쓰는 이들이 많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쓰러진 고목의 둥치를 가져다가 차판으로 쓴다든지, 밥그릇을 찻그릇으로 쓴다든지 하는 식으로 상상력을 경쟁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근현대 훌륭한 작가 가와이 간지로의 집에는 조선에서 흘러들어온 목재 소 여물통이 있는데 좌우로 옴폭하게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소 두 마리가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뵈는데 자기 집에서 허드렛일하던 조선인 하녀들이 깔깔 웃으면서 이를 가져다가 싱크대로 사용했다. 한쪽에서 씻고, 한쪽에서 헹구기 딱 알맞았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의 습속으로는 절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그들은 반드시 정해진 도구는 정해진 규칙과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그건 도구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가와이 간지로는 좋은 의미로 매우 놀라며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예술가다.”
첫째 딸과 산책길에 그녀가 잘생긴 도토리 몇 알을 주워왔다. 다람쥐 같아서 잘도 주워 호주머니 속에 고이 넣어두곤 하는데, 집에 오면 새까맣게 까먹어 버려 아내가 주워내곤 한다. 그것 역시 다람쥐와 닮았다. 아내는 걔 중 동그랗고 잘생긴 도토리를 벗겨 밑둥만 남긴 뒤 삼천 원 뽑기에서 얻은 검정색 고양이 피규어 머리에 씌워 놓았다. 그리곤 거실 속 작은 식물원-스텝관steppe館으로 가족끼리 이름 붙인, 스텝은 건조기후대를 뜻한다-에 몰래 숨겨 놓았는데, 그 맵시가 꽤 고왔다. 첫째가 이를 발견한 것은 몇 일 뒤의 일이었고 모두가 함께 한바탕 웃었다.
2025년 3월 20일,
정 다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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