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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Jul 15. 2024

장마

장맛비를 뚫고 도서관 가는 길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찰박 찰박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집을 나올 때만 해도 이슬처럼 내리던 비가 이제는 제법 굵어져 길가에 고이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를 확인하고도 집을 나서는 일은 나에게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남색의 두툼한 장우산을 들고 얼마 전 큰맘 먹고 장만한 기다란 레인부츠를 신으니 제법 기분이 좋아져 외출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먼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옆동네에 있는 도서관에 가는 길인데도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망설였다. 점점 굵어진 빗줄기에 버티지 못한 자잘한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길가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칠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가방이 젖을까 가방을 앞으로 고쳐 메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등 쪽으로 빗방울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젖지 않는 것은 우산으로 둘러싼 머리와 레인부츠를 신은 발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느낌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놀이터에서 비를 맞으며 신나게 웃는 아이들이 보였다. 비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까. 어린아이들이야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모든 날을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니 말이다. 나도 어릴 적에는 이렇게 몰아쳐 내리는 비에도 옷이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구들과 뛰어다니고 미끄럼틀을 타고, 슬리퍼로 물 수제비를 뜨기도 했다. 


등이 조금씩 젖어들어오자 어릴 적 생각이 났다. 그때는 옷이 젖어도, 운동화에 물이 가득 들어차도 찝찝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즐거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을 보니 나도 어른이 되기는 했나 보다. 빗소리가 점점 커져 이어폰 사이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젠 등뿐만이 아니라 짧은 반바지까지 젖어들기 시작했다.


집과 도서관의 중간쯤 왔을 때 이미 옷이 다 젖어버리고야 말았다. 장마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비에 무언가 큼지막한 양동이 같은 것으로 앞뒤 좌우로 물을 더 끼얹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젖은 몸 도서관까지 가보자 하고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장화에 약간의 물이 차고 옷이 흠뻑 젖고 나서야 도서관 로비에 도착했다. 우산을 털고, 옷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뒤 자료실로 갔다. 리놀륨 바닥에 장화가 닿을 때마다 찌익찌익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서관은 한산했고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볼과 팔과 다리에 닿았다. 내가 젖은 몰골로 자료실에 들어서자 사서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비를 뚫고 누군가가 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자료실의 서늘함에 잠시 멈춰 서있다가 서가 사이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대출대로 가져갔다.


책을 받아 들고 혹여나 책이 젖을까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집어넣고 자료실 문을 나섰다. 찌익찌익 소리 너머로 어떤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다시 도서관 로비 앞에 서서 옷을 가다듬고 올 때보다 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집을 나설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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