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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롤로 Sep 01. 2023

당신은 누구시길래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쓴 일기

손가락 끝부터 힘을 뺀다. 차츰 손목 팔목 어깨로 이어지는 이완은 다시 발가락 끝으로 간다. 그곳에서부터 발목 종아리 허벅지까지 다시 이완을 반복한다. 심장도 이완이 가능하다면 몸 끝에서 시작된 이완을 심장까지 연결해 본다. 더불어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것을 평소보다 천천히 천천히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반복한다. 계속해서 반복해 준다. 동작을 반복할수록 머릿속 생각은 점차 사라진다. 몸이 나른해짐을 느끼다 어느 순간 머릿속이 동작에 대한 강박으로 가득 차버린다. 이내 가득 차버린 강박적인 생각은 머릿속 어딘가에 또 다른 구멍을 내버리고 생각의 줄기가 줄줄줄 흘러내리게 만들어 버린다. 오늘도 실패다. 결국 잠들지 못하고 잡념의 나라로 빠져버린다.


불면(不眠)은 아주 오래된 나의 친구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느냐 인사하며 지낼 처지는 아니지만 아마도 나의 가장 오랜 친구일 것이다. 나에게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그 시절 나에겐 남들보다 잠이 늦게 온다는 것은 즐겁고 고마운 일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에 책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잠이 오지 않음이 축복같이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새벽까지 하고 싶은 걸 모두 하고 학교에 간다. 밤을 새우고 나면 잠이라는 친구는 불면의 감시를 피해 잠시 잠시 나를 만나러 와줬다. 마치 쉬는 시간 나를 만나러 왔던 다른 반 친구처럼. 그렇게 낮에 잠깐씩 잠을 만나고 나면 밤에는 어김없이 불면이라는 친구를 만난다. 


불면과 멀어지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그 친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를 더 많이 좋아했는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캐모마일이라는 친구가 나를 돕기 위해 나선 적이 있었지만 불면에게 호되게 혼난 뒤 본전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10시 취침'이라는 친구도 나를 돕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10시에 누워도 매번 12시가 넘어 잠드는 나 때문에 그 2시간 동안 뚜드려 맞다가 도망쳤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완 요법'이라는 친구에게도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이 친구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패배의 그림자를 짙게 풍기며 두 손을 들어버렸다. 불면은 그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다. 어느 박사가 만든 잠드는 방법이라느니 평생 불면에 시달리다 기적적으로 치료했다는 어르신의 방법도 소용없었다. 


불면과 나의 신경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누가 이기고 누가 지고 하는 싸움은 당연히 아니다. 둘 다 주체가 나이니까. 하지만 불면이 이기면 꽤나 문제가 심각해진다. 불면이 약 한 달간 나를 이기려고 기를 쓴 해가 있었다. 머리는 점점 푸석해졌고 눈은 늘 충혈된 상태였으며, 걸음은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그래 네가 이겼다. 내가 졌다. 어떻게 해야 잠이라는 친구를 좀 편하게 만나게 해 줄래."라고 애원해 봐도 그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무엇에 기분이 상했는지,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지 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그 녀석의 마음이 풀리고  나를 놓아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그 무렵이었다. 규칙이와 운동이가 나를 찾아온 것이.


그 두녀석과의 만남은 아직도 쓰다. 한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늦잠과 게으름이라는 친구와 상극이었고, 다른 한 녀석은 가느다란 내 팔다리와 저체중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정말 대단한 녀석들이었다. 언제고 손을 내밀면 나를 잡아주었고 그들의 손을 잡은 나는 불면 앞에서 꽤나 당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규칙이는 내게 말했다. "규칙적으로 살아야 해 그리고 규칙 없는 혼돈은 재미가 없어. 넌 그걸 알아야 해." 처음엔 부정했지만 규칙이의 말이 맞았다. 규칙적인 삶 속에 작은 혼돈은 늘 누리던 혼돈보다 몇 배는 재미있고 달콤했다. 그리고 운동이도 내게 말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널 두 배 빨리 잃게 될 거야." 나를 잃는다니 이게 무슨 말이지. 예전엔 움직일수록 시간이 빠르게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움직이지 않았던 시간 속에는 아무것도 채워진 것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두 친구와 친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면이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워낙 대범하고 강인한 녀석인지라 잊을만하면 나를 찾아와 새벽 4시까지 혹은 아침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불면과의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느 날은 참다 참다 잠에게 하소연을 했다. 불면 그 자식은 대체 누구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잠이 꿈이라는 친구를 시켜 내게 말했다. 불면도 잠도 규칙이도 운동이도 모두 너라고, 그러니까 만약 현재 네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거기에 불면의 지분도 있는 거니까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고. 꿈이라서 그런지 순순히 알겠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여전히 난 생각한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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