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熱病)

충실했던 나의 강아지에게 보내는 편지

by 롤로

간밤에 열이 심하게 나 지독하게 앓았더니 아침 알람을 듣지 못했어. 10개나 맞춰 놓았는데 말이야. 마지막 알람 소리를 듣고도 눈을 뜨지 못한 게 얼마만인지 몰라. 그래도 많이 늦지는 않아서 아침을 포기하고 지각은 면했어. 이마를 짚어보니 아직 미열이 남아 있긴 하더라고, 앓은 것에 비하면 꽤 선전했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오랜만에 아팠어. 간혹 감기나 몸살 정도 걸려 몸이 피곤했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주말 내내 몸져누워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건, 그래 정말 오랜만이지. 아프다는 건 건강이 나빠질 때쯤 몸이 보내는 신호라고 했는데 앞으로 건강을 좀 잃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어. 열이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지만 해열제로 꾸역꾸역 버텨내는 나 자신이 놀랍기도 하더라. 하지만 병원에 갈 이유는 없었어. 왜 아픈지 언제 이 아픔이 사라질지 막연히 알고 있었으니까.


열병(熱病), 이별의 또 다른 이름 열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나는 그 병이 왜 찾아왔는지 심지어 어떤 계기로 찾아왔는지도 알아. 너는 나를 무던히 무심히 떠났고 나도 너를 무심하게 무던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과 마음과 세포 하나하나가 기억하고 있는 너에 대한 흔적들은 그렇게 쉽사리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나 봐. 어딘가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떼어낸 다는 것은 떼어짐을 당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떼어내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한가 봐.


나의 열병(熱病)도 곧 나아지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잊을 생각이 없어. 네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갈 테지만 말이야. 시간은 아마 내 몸과 마음에 새겨진 작은 기억의 조각들을 서걱서걱 베어내 세월 속으로 점차 사라지겠지.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발버둥 칠수록 더 빨리 사라질 것만 같아. 네가 앉아 있던 의자와 너의 잠자리, 네가 좋아하던 인형들. 그래서 난 그런 것들을 치우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어.


네가 쉬었던 마지막 숨과 짧게 오르락내리락하던 너의 배를 기억해. 우리가 함께 한 15년이라는 순간이 그 짧은 몇 분의 시간으로 압축되는 것만 같았던 시간. 그 시간에 나는 너를 보낸다는 것을 실감했고, 너는 나를 떠난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아. 늘 나의 일방적인 대화 시도라고 생각했는데, 너의 눈빛은 나의 말보다 더 많은 의미들을 가지고 있었구나. 왜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지금도 후회스럽고 아쉬워.


늘 떠나보내거나 끝이 난 후에 아쉬워하지, 그래서 인간인가 봐. 넌 늘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늘 내가 가장 우선이었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 인간이기에 그랬다고 홀로 위안을 삼지만 그것처럼 비겁한 변명은 없는 것 같네. 고마웠다고 말해야겠다. 그리고 덕분에 행복했다고 말해야겠다. 그리고 나중에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르고 또 만나자고 말해야겠다. 그렇게 난 또 너에게 나의 행복의 닻을 넘기고 싶다. 나의 사랑스러운 강아지야. 나는 너의 기억을 생채기처럼 잊혀질 수 없는 각인으로 안고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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