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함흥냉면 파다

by 크림동동

나는 함흥냉면 파다. 냉면집에 가면 항상 함흥냉면만 시켰다. 요즘은 평양냉면이 인기이긴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국물 시원한 것 빼고는 별 매력도 없는 평양냉면을 시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국물은 먹지 않는다. 국물 없이 면만 먹으면 평양냉면은 한 그릇을 다 먹어도 배가 허전했다. 더더욱 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평양냉면은 나한테 '시키기엔 돈 아까운 음식'이었다.


그에 비해 함흥냉면은 맛있었다. 입에 착착 붙는 매콤한 양념에 뜨끈한 육수까지 곁들이면 둘의 조합이 환상이었다. 입이 매울 때마다 육수를 한 모금씩 마시다 보면 육수로 이미 배가 부르곤 했다. 어릴 때 가족이 자주 가던 부산 광복동의 원산면옥에서는 함흥냉면을 시키면 육수를 아예 양은 주전자로 갖다 줬다. 컵도 그 옛날 다방에서나 볼 법한 갈색의 오래된 뭉퉁한 거였다. 아빠와 나는 함흥냉면, 엄마와 동생들은 평양냉면을 시켰지만 육수를 좋아하는 건 모두 같았다. 그래서 거기서 식사를 할 때면 육수 주전자 추가는 기본이었다. 한번도 부족해 2번이나 추가해 먹은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함흥냉면은 사실 함경도 지방 사람들이 먹던 감자 농마 국수에서 발전된 것으로 원래 함흥냉면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거다. 평양냉면이 평양 사람들이 먹던 진짜 냉면을 그대로 이은 데 비해 함흥냉면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평양냉면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 붙인 거에 불과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함흥냉면은 남한에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라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시절 냉면을 먹을 때도 함흥냉면과 평양냉면 면발이 다른 게 보이긴 했다. 함흥냉면 면이 평양냉면에 비해 더 가늘고 색이 짙고 질겼다. 면이 어찌나 질긴지 어떨 때는 꼭 고무줄 같았다. 알고 보니 면이 그렇게 질긴 건 고구마와 감자 전분이 들어가서 그렇다고 했다. 그에 비해 평양냉면은 색이 좀 더 밝고 굵고 잘 끊어졌다. 면에 메밀이 들어가 함흥냉면 면과는 반대로 찰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사랑해 온 함흥냉면이 이른바 '족보도 없는 음식'이었다니 어쩐지 허탈했다.


말이 나온 김에 충격적인 사실을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나는 이때껏 평양냉면을 물냉면으로 알았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고깃집에서 고기 먹은 후 나오는 후식 냉면, 분식집에 있는 물냉면과 같은 걸로 알았다는 말이다. 사실 그래서 평양냉면을 우습게 본 것도 있다. 물냉면 국물 맛이 아무리 좋다 한들 기본적으로 조미료 국물 맛인데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압구정 면옥에서 눈을 뜨는 순간이 왔다. 남편 친구 부부와 함께 한 자리였는데 이 부부는 최근 평양냉면 맛에 빠졌다고 했다. 그래서 맛집 순례 중이기에 장소를 압구정면옥으로 잡은 거였다. 압구정 면옥은 이 동네에서는 괜찮다는 평이지만 냉면 마니아들 사이에서 아주 순위가 높지는 않다. 그래도 동네 평양냉면 맛집이라고 하니 언제 한 번 가 봐야지 생각하던 차이긴 했다.


메밀이 80% 들어갔다는 일반냉면은 겉보기에는 평범했다. 하지만 맛을 보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국물은 육수 향이 진했고 면은 툭툭 끊겼다. 내가 알던 물냉면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깊이가 느껴졌다. 고기와 부재료를 넣고 오랫동안 우리지 않으면 낼 수 없는 맛이었다. ‘이래서 평양냉면, 평양냉면 하는구나, 이래서 평양냉면 가격이 비싸구나.’ 비로소 납득이 되었다.

KakaoTalk_20250803_050826521.jpg 압구정면옥의 평양냉면


내가 고깃집 후식 물냉면과 평양냉면을 같은 걸로 생각했다고 하자 다들 웃었다. 나도 웃었다. 하지만 창피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처음이란 게 있는 법이다. 비로소 냉면 마니아들이 냉면 맛집을 찾아다니는 심정도 이해되었다. 나 역시 가게마다 다르다는 맛을 탐구해 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내가 평양냉면 파가 되었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함흥냉면 파다.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맛을 결정하는 건 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원산면옥에서 먹던 함흥냉면의 매운맛과 구수한 육수, 가족이 함께 앉아 먹던 풍경, 이 모든 게 여전히 함흥냉면 쪽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말 나온 김에 원산면옥에 다시 한번 가 보고 싶다. 다음에 부산에 내려가면 한번 가 봐야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잘 생긴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