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 숙소체험이 남긴 것
한 여행에 극과 극 숙소 체험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 고성-속초 여행 때 그 드문 경험을 했다.
첫날밤 숙소는 울산바위 인근의 ‘한화리조트 설악 별관’이었다.
도대체 언제 적 ‘한화리조트’인가! 숙박 업계가 너도나도 외국 이름을 내걸고 고급화로 경쟁하는 마당에 여전히 고풍스러운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게 정겹기조차 했다. 참고로 본관은 ‘소라노’란 이름으로 별개의 숙박 시설이다. ‘한화리조트 쏘라노’가 고급스럽게 단장한 현대적인 시설인데 반해 별관은 가격을 제외하면 장점이라 할만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이 낡았고 불편했다. 낮은 층수의 숙박 등들이 옆으로 구조였는데 엘리베이터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심지어 공간도 비좁았다. 방은 80년대 그 자체였다. 아무리 콘도라지만 비누 한 장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취사 시설이 있다 해도 냄새나지 않는 음식 데워 먹기 정도만 가능해서 취사 금지나 마찬가지였다.
정점은 방 열쇠였다. 21세기에 열쇠로 문을 여는 호텔 방이라니! 그나마 부드럽게 열리지도 않았다. 처음 열렸을 때도 한참을 끙끙거렸는데 두 번째에는 기어이 사달이 났다. 아무리 해도 열쇠가 돌아가지 않아 별수 없이 직원을 불러야 했다. 전화를 받고 나타난 직원은 머쓱하게도 한 번에 쓱 열어주었다. 누군가는 이것조차 ‘복고’라고 부르고 향수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잠만 잘 거기에 참을 수 있는 숙소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정말 친절했다. 이 숙소의 가장 크면서도 유일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80-90년대에서 그대로 날아온 듯한 호텔에 2020년대의 젊은 직원이라니 이보다 더 맞지 않는 조합도 없었다. 차라리 좀 더 원숙하고 노련한 직원이었다면 나았을까? 아무리 봐도 20대로 보이는 젊은 얼굴에 녹음된 것처럼 나오는 친절 멘트는 어색함만 남겼다.
그에 비해 두 번째 숙소는 모든 것이 첫 번째와 반대였다. 두 번째 숙소는 ‘르 컬렉티브 속초중앙’이었는데 위치는 시내 쪽, 청초호 바로 옆이었다. 이름처럼 속초 중앙 시장과도 도보 5분 거리였다. 시설은 그야말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현대적이고 깨끗하고 편리했다. 우리는 가장 기본 룸을 예약했는데 원룸 형태의 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세탁기, 전자레인지, 냉장고, 캡슐커피 머신까지 있을 건 다 있었다. 전날 한화리조트 설악 별관에서 비누 한 장 찾아볼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르 컬렉티브 룸에는 샴푸, 컨디셔너, 비누와 같은 기본 욕실 어메니티는 물론 캡슐 커피와 생수도 제공되었다.
공동 시설도 훌륭했다. 지상에는 넓은 온수풀과 노천탕이 있었다. 그 외에 공유 주방이 있어 먹거리를 조리해서 먹을 수도 있었다. 공유 주방이 있음에도 식당이 따로 있어 조식을 신청해 먹을 수도 있었다. 지하 1층에는 투숙객 1일 1회 무료 이용 가능한 사우나, 북카페, 편의점이 있었다. 지하 1층 시설은 주차장과 연결되어 각 동에서 바로 접근이 가능했다.
이 중에서 우리 부부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무료 사우나 혜택이었다. 사우나는 넓고 깨끗하고 기본 어메니티까지 다 갖추어 있는 것이 어지간한 호텔 사우나 못지않았다. 비록 1박이었지만 체크인 한 날 저녁, 체크아웃하는 날 아침, 이렇게 야무지게 사우나를 이용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후 뽀송하고 깨끗한 방에 돌아오면 기분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르 컬렉티브 속초 중앙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무인 운영체계였다. 물론 사우나를 비롯한 각 시설에는 관리 직원이 있었지만 체크인, 체크아웃, 주차 등록 및 비품 신청, 체크아웃 시간 연장과 같은 기본적인 숙박 절차는 모두 알림톡으로 진행되었다. 전날의 한화리조트가 낡은 시설에 직원이 가득했던 것과 달리 이곳은 현대적 시설에 (체크인을 담당하는) 직원이라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분명 체크인 대기 시간도 없고 편리한데도 어딘가 삭막하고 심지어 막막한 기분까지 들었다. FAQ 외 사소한 궁금증은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할지부터 알 수가 없었다. 사람한테 직접 물을 수만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텐데 그러질 못하니 답답했다. 물론 챗봇으로 문의할 수가 있었고, 이메일, 그리고 정말 비상시를 대비한 전화번호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직원과 직접 소통하는 것보다는 번거롭고 시간도 걸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나는 시대 흐름을 꽤 잘 쫓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렇지 않았다. 갑자기 키오스크 앞에 선 노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실은 간신히 허덕허덕 변화를 쫓아갈 뿐이었는데 밑천이 바닥나 버린 기분이었다. 고작 무인 숙박 시스템이 낯설고 자연스럽게 이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솔직히 한화리즈트 별관에서 열쇠가 말을 듣지 않을 때 직원에게 전화할 수 있었던 때가 그리웠다. 그때 숙박 시설은 낡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용하기에는 편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방에 새롭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편리했지만 온통 새로운 세상 앞에 나는 기가 죽고 작아졌다.
편리하지만 사람의 얼굴이 사라진 미래와 사람은 가득하지만 불편한 과거, 그 사이에 접점은 없는 걸까? 그걸 찾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속초의 말쑥한 숙소에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