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도 식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8월 마지막주에는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 생신이 있다. 단순히 같은 주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29일, 30일, 이렇게 연달아 붙어 있다.
친정은 부산이고 시댁은 서울이다. 그런데 나는 서울에 살고 있어 둘 다 가기에는 무리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어머니 생신에만 간다. 거리와 시간 등을 고려한 최적의 선택이다. 대신 친정에는 여름휴가와 붙이거나 아예 추석 인사를 겸해 내려가서 챙긴다. 결혼 후 줄곧 이렇게 해 오다 보니 이젠 친정에서도 딱히 아쉬워하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마 생신 당일을 그냥 보내지는 않는다. 내려가지 못해도 미역국만은 꼭 끓인다. 내 나름의 엄마 생신을 기념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마 생신 미역국을 끓이고 나면 바로 다음 날이 시어머니 생신이다. 어차피 시댁에 가서 미역국을 먹겠지만 이것도 미역국 없이 넘기기에는 어쩐지 허전하다. 이틀 연속으로 새 미역국을 끓여댈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예 한번 미역국을 끓일 때 한 솥 끓여 먹고 또 먹는다. 그래서. 8월 마지막 주는 항상 '우리 집 미역국 주간'이다.
매번 똑같은 미역국을 끓이는 건 지겨워서 요즘은 미역국에 변주를 줘 본다. 가자미도 넣어 보고 시장에서 전복을 사다가 씻어 넣기도 해 봤다. 소고기는 잘 넣지 않는다. 남편은 미역국 국물에 기름이 뜬 게 싫단다. 올해 미역국에는 황태채와 말린 홍합을 넣어 시원하게 맛을 냈다. 명색은 어머님들 생신 기념인데 정작 입맛은 남편한테 맞춘다. 여러모로 우리 집 미역국은 짬뽕이다.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중요한 건 미역국을 끓이는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 미역국 주간이 끝난 게 아니다. 아니,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시댁 식구와 미역국을 먹는 일이다.
가족 행사 때 외식하는 집도 많다지만 우리 시댁은 그런 곳이 아니다. 평생 '밖에 나가면 뭐 별 거 있니?'를 입에 달고 사신 시어머니는 식구들을 불러 먹이시는 게 낙이셨다. 메뉴라고 별 건 없었다. '고기 좀 굽고 해서 먹는' 밥상이었다. 그래도 젊으실 때는 이것저것 새로운 것도 좀 시도하시더니 언젠가부터는 밥상이 항상 똑같다. 오죽하면 이제 눈감고도 상차림을 외울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해도 절대 오지 않으시고 외식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내가 음식을 해서 가겠다고 하면 손사래부터 치신다. 그러니 어머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리려면 얌전히 가서 차리신 음식을 먹는 게 제일이다. 그래도 요 몇 년 전부터는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외식을 좀 하시는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한번 모시고 나가려면 몇 번을 권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 덕에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내가 전화드렸을 때는 그냥 집으로 와라 하시던 분이 아들 전화 한 통에는 웬일로 그러마 하셨다. 각오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너무 힘이 빠졌다. 역시 아들 사랑인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드셔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가장 어려운 고개는 넘었다지만 아직 식당을 정하는 일이 남았다. 이 또한 쉽지 않다. 너무 비싼 곳도, 너무 싼 곳도 안된다. 너무 기름지거나 자극적인 음식도 안되고 애들이나 먹는 국적 불명의 음식도 안된다. 암 이력이 있으시니 회 같은 날음식도 안된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된다. 갈 만한 곳이 없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이번에도 남편이 좋은 생각을 냈다. 생신이니 미역국집에 가자는 것이었다. 마침 시댁 가까이에 유명한 미역국집이 있었다. 마치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한 가게인양 가게 이름에도 '효'자가 들어갔다. 그곳으로 결정했다.
동네 맛집인지 사람도 많았다. 시동생들까지 5명 자리 잡고 앉은 후 미역국을 주문했다. 시어머니가 드실 미역국은 전복과 낙지가 들어간 제일 비싼 특선 미역국으로 했다. 시어머니는 남편도 당신과 같이 특선 미역국을 하라고 하셨다. 시동생들은 그냥 조개 미역국을 먹겠다고 했다. 여기에 황태구이와 임연수 구이까지 추가하니 제법 잔칫상차림처럼 보였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시동생들이 한 마디씩 했다.
"그런데 미역국집에 간다고 해서 놀랐어요. 미역국도 돈 주고 사 먹나 해서요."
"미역국은 식사에 기본으로 딸려 나오는 게 아니었나요? 이것만 하는 식당이 있는 줄 처음 알았어요."
그러다가 어미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미역국만 하는 식당은 처음이다."
마음이 쿡 찔린 것 같았다. '미역국을 왜 돈 주고 사 먹냐, 미역국은 기본으로 딸려 나오는 것 아니냐, 미역국만 하는 식당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평생 가족을 위해 미역국을 끓여 오신 어머님, 가족들은 어머님이 끓인 미역국은 당연히 먹으면서 누구 하나 어머님 생신에 미역국을 끓여 드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끓이시는 미역국은 매일 차리는 밥상처럼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이어서 미역국이란 음식이 따로 식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생일상의 주인공이면서도 식탁의 주인공으로는 어색하게 여겨지는 미역국. 미역국이 마치 어머님의 인생 같았다.
외식은 무슨 외식이냐고 부담스러워하시던 모습과는 달리 어머님은 전복과 낙지가 들어간 미역국을 후룩후룩 맛있게 드셨다. 그 모습을 보며 앞으로 어머님을 모시고 좋은 곳을 많이 모시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밖에는 이리도 맛있는 식당이 많은데 그걸 모르고 사신 인생에 새삼 죄송스러웠다. 백세 시대라지만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어머님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앞으로는 손사래를 치시더라도 지치지 말고 계속 권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