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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쁜 줄 알았다

by 크림동동

‘연주회 있으셨나 봐요. 초대해 주시지.’


‘??’


어느 날, 평소 연락이 뜸하던 지인에게서 뜬금없는 내용의 카톡이 왔다.


알고 보니 얼마 전 한 음악회에 다녀온 사진을 카톡 프로필에 올렸는데 그걸 보고 내가 연주회에 나간 걸로 착각한 거였다. 그 사진은 공연이 끝나고 단원들이 인사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모두 서 있었고 드레스를 입은 제1 바이올린 주자인 여성 단장이 가운데 서서 바이올린을 손에 든 채 몸을 약간 돌리고 있었다. ‘연주를 한 게 아니라 연주회에 간 거’라고 설명하고는 둘이 대화방에서 웃었다.


얼마 후의 일이었다. 집 앞 엘리베이터를 타러 나갔다가 평소 인사하고 지내는 이웃과 마주쳤다. 그런데 그분도 나를 보자마자, “연주회 했어요? 카톡 사진 봤는데, 진짜 멋있더라.” 하는 거였다. 내가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정말 딱 ‘나’인 줄 알았다며 ‘나’와 진짜 닮았더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궁금했다. 도대체 누가 그렇게 나와 닮았다는 걸까? 아마도 앞에 서 있던 단을 말하는 듯했지만 내 기억 속에 그날 밤 연주를 한 단장은 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 혹시 사진 속의 다른 사람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샅샅이 살펴봤지만 예상대로였다. 나와 비슷한 얼굴은 없었다. 너무 젊거나 첫눈에도 체형이 다르거나 그것도 아니면 머리 모양이 달라 누가 봐도 내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누구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다시 한번 찬찬히 봤다. 그리고 그제야 발견했다 단장이 몸을 돌리고 있어 틀어 올린 머리가 뒷사람의 옷 색깔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언뜻 보기엔 단발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손에는 바이올린…. 역시 처음 짐작대로 단장을 보고 ‘나’라고 착각한 거였다.


KakaoTalk_20250917_141326698.jpg 문제의 사진. 초상권 때문에 얼굴에는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이렇게 마침내 수수께끼는 풀렸지만 후련하기는커녕 오히려 살짝 충격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이렇게 보인다고?’


내가 보기에 단장의 얼굴은 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키도 크고 날씬하고 얼굴에는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뭐랄까, 그러니까.. 예쁘지는 않았다.




이제껏 ‘말랐다’, ‘동안이다’ 소리를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다. 옷 가게에 들어가면 ‘언니는 말라서, 목이 길어서 옷이 잘 어울려’ 하는 말을 늘 들었다. ‘동안’이란 소리도 자주 들었다. 심지어 지난번에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어르신이 오시더니 불쑥 “면 살이에요? 40대? 50대? 50대 맞죠? 우리끼리 40대다, 50대다 말이 많았거든. 그나저나 진짜 동안이시네. 50대로 안 보여요.” 하는 일도 겪었던 것이다.(물론 그 이후 헬스장을 옮겼다.) 마르고, 옷이 잘 어울리고, 게다가 동안이니 나는 내가 예쁜 줄 알고 살았다. 세상 기준에 맞는 눈 크고 몸매 좋은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어도 꾸미질 않아서 그렇지 ‘자연미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닮았다고 하는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 얼굴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 얼굴 역시 젊어 보였지만 정확히 살아온 만큼의 세월이 찍혀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였지만 예쁘다고 말하기에는 거리가 멀었다. 어딘가 엄격해 보이면서도 볼살이 빠져 광대뼈가 보이는 얼굴. 이게 바로 세상이 보는 나였던가? 내 안 어딘가에서 환상이 ‘파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결국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내 눈이다. 아니, 사실 눈이 보는 것도 아니다. 눈은 시각적 정보를 모아 뇌로 전달할 뿐, 실제 보는 것은 ‘뇌’다. 뇌는 눈이 전달한 정보를 조합해 ‘나’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보는 ‘나’는 ‘실제의 나’가 아닌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 셈이다.


그러므로 나의 기준 역시 허상이다. 절대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딘가 귀에 익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주변 어른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은 별로 없다.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배경음악인 양 듣고 흘리기만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보는 ‘나’가 형체를 가지고 등장한 것이다. 내가 머릿속에서 보던 ‘나’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둘이 엄연한 차이 앞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동안 예쁘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내심 부끄러웠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나의 자존감은 중요하다. 그것은 내 세계를 떠받치는 중심축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그러하다. 나는 이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을 풀이하면 아마 나의 기준은 가지되 열린 마음을 갖자는 말일 거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자기 줏대는 있대 꼰대는 되지 말자는 이야기쯤 되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를 다루며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삶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생각 이전에 ‘내가 예쁜 줄 알았던’ 환상을 빼앗긴 50대 아줌마는 조금 서글펐다. 얼굴뿐 아니라 뇌도 같이 늙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면 이 일도 잊어버리겠지만 지금은 좀 뼈아프다. 하지만 별수 없다. 조금이라도 늦추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예쁜 구석이라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오늘 밤에는 얼굴에 마스크팩이라도 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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