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배론성지
제천 배론성지는 단풍 명소로 유명하다. 언젠가 한 번 가 봐야지 생각했던 곳이고, 지난달에는 꼭 가 봐야겠다 마음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함께 할 수 있는 주말에는 단풍객들이 너무 많았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서울에서 2시간 거리지만, 단풍철 토요일이라면 그 두 배는 각오하는 게 마음 편했다. 차 막히는 건 질색하고, 일요일은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쉬어야 한다는 남편을 생각한다면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토요일 아침 일찍 출발해서 성지를 둘러보고 점심 전에 다시 돌아오는 거였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거기까지 가서 성지만 달랑 보고 오느냐'라는 소리가 나올 게 뻔했다.
그래서 평일 혼자 아침 일찍 다녀오기로 했다.
단풍이 절정이라던 주말을 막 지난 수요일 아침이었다. 때마침 그날 아침에는 기온이 뚝 떨어졌다. 초겨울 날씨 같은 온도에 대비해 단단히 무장하고 7시 전에 서울에서 출발했다. 운전 경력은 오래되었다지만 혼자 시도 경계선을 넘어가며 두 시간 고속도로를 달린 건 처음이라 긴장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움직였더니 운전 도중 졸음도 밀려왔다. 차가 동쪽으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며 떠오르는 아침 해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차창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이러다 행여 사고라도 날까 두근두근했지만 핸들을 꽉 잡고 내려갔다.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8시 50분, 목적지에 도착했다. 성지가 코 앞에 보일 때까지 주변이 썰렁했던 안성 미리내 성지에 비해 배론 성지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한참 전부터 아기자기한 마을이 보였다. 이곳이 규모가 더 크고 잘 꾸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착해 보니 주차장도 널찍했다. 주말이면 방문객 차량으로 꽉 찼을 그곳이 그날 아침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차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찔렀다. 하늘은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랬다. 나무들은 이미 잎을 거의 다 떨구어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이었다. 낙엽이 수북한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성가만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성가였다. 눈앞에는 조금 앞에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였다. 절로 마음이 성스러워졌다. 어쩐지 마음이 북받쳤다.
성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드린 뒤 조용히 성지를 둘러봤다. 배론 성지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김대건 신부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이며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면 최양업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후 12년 동안 전국을 돌며 신앙을 전파하는 데 힘쓴 분이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또 다른 천주교 역사가 깃들어 있다. 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대대적인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 바람이 불자, 황사영은 이곳 배론 마을 옹기굴에 숨어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이때 그가 몸을 숨겼던 곳은 현재 '황사영 토굴'이라 해서 방문객들이 둘러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배론 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 성지의 건축물들은 한옥과 한식 양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조화는 너무 아름답다.
일례로 문은 한식 기와 대문이지만, 옆에 서 있는 성 요셉 상은 그리스식 조각이다. 언뜻 너무 달라 보이는 두 사물이지만 함께 있으니 이상하게 잘 어울렸다. 배로 성지를 찾는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사진 한 장을 남기는 유명한 연못과 무지개다리가 있다. 전통 한옥 정원 스타일의 연못과 다리 뒤에는 2층 한옥 건물이 보이고 그 앞에 예수님 십자가 상이 서 있다. 한식과 서양의 조화는 절묘하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 가장 좋았던 건 텅 빔, 그 자체였다. 이따금 들리는 새들이 '깟깟'거리는 소리와 성가 외에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내 마음은 차분해졌다. 성지에 왔다는 느낌이 났다. 이른 아침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처음 생각대로 남편과 주말에 왔다면 나는 관광객 중 한 명이었을 거다. 이 모든 공간과 조각들은 단지 사진 한 장을 위한 예쁘장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이 물러난 고요의 순간, 이 모든 것들은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순간에 있을 수 있어 기뻤다.
오래 머무르진 못했다. 옷을 껴 입었는데도 쌀쌀한 공기 때문에 손발이 얼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온 터라 배도 고파왔다. 차를 돌려 나오는데 한두 대씩 성지로 들어오는 차들이 보였다. 서울로 오는 길은 빨랐다. 정체는 전혀 없었다. 돌아오며 생각했다. 언젠가 또 오게 될까? 그럴 것이다. 나는 성지의 사장 가장 좋은 순간, 가장 성스러운 순간에 있었다. 그 시간은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그 시간을 다시 맛보기 위해 다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