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국내 성지 순례 1

천주교 수원 성지(북수동 성당)

by 크림동동

나에게 2025년은 ‘성지 순례의 해’였다. 봄에는 성당 차원에서 ‘전 신자 대상 서울 순례의 길 걷기’ 행사가 있었다. 가을에는 혼자서 서울 근교 성지를 한 군데씩 가 보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우연히, 때로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군데씩 가다 보니 어느새 마치 성지 순례를 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새삼 알게 된 건 굳이 이탈리아나 이스라엘까지 나가지 않아도 서울과 그 주변에도 성지가 참 많다는 거다. 왜 ‘성지’하면 꼭 해외에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한국 천주교의 발자취를 담고 있는 각각의 성지는 각기 다른 이야기와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굳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한번 가볼 만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성지에 가면 어쩐지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큰 사찰에 가면 마음이 정화되는 것과 같다. 그런 걸 보면 성지에는 정말 성스러운 기운이 깃들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가 본 서울 근교 성지들을 소개해 본다. 모두 차로 한두 시간 거리에 있어 방문하기도 어렵지 않다. 먼저 수원 성지부터 시작해 본다.




-수원 성지(북수동 성당)


수원 행궁 바로 맞은편이어서 함께 묶어 관광하면 좋다. 수원 행궁과 수원 성지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두 건물 사이의 시간은 이어지지만 각각이 품고 있는 기억은 다르다. 수원 행궁은 정조가 수원에 행차할 때 머물던 궁이다. 수원 행궁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화성은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조선 후기의 빛나는 건축 유산이다. 이 화성을 설계한 사람이 정약용인데 그 또한 천주교 신자였다. 건축뿐 아니라 다방면에 박식했던 그는 진정 조선 후기의 천재, 르네상스적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중흥을 이끌었던 정조가 죽자 그의 뒤를 이은 어린 아들, 순조는 천주교 박해로 통치 첫해를 시작한다. 사실 박해를 지시한 것은 순조 그 자신이 아니라 그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대비였지만, 역사는 이 박해를 ‘순조’ 시대에 일어난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천주교인과 서양 신부들이 한양과 전국에서 잡혀 와 처형당했다. 수원 성지의 북수동 성당은 한양 이남 경기도, 충청, 강원도 지역에 살던 천주교인들을 잡아 와 고문하고 처형하던 포도청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주교가 쓰는 모자를 형상화한 붉은 벽돌 건물 꼭대기에는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칼을 든 대천사 미카엘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딕 풍의 다른 성당과 구분되는 외관에서부터 지난날의 박해의 역사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칼바람 속에 천주교인이던 정약용 역시 관직을 잃고 귀양을 간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버린 대가로 목숨은 부지한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두 건물, 수원 행궁과 수원 성지 사이에 시간은 흐르지만 그 시간이 담고 있는 풍경은 정반대다.

KakaoTalk_20251217_142629449.jpg 미카엘 대천사가 내려다보는 본당 건물


수원 성지에는 성당 외에 둘러봐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있다. 바로 뽈리 화랑이다. 성당 건물이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담고 있다면 뽈리 화랑은 일제 강점기와 20세기 현대 천주교의 기억을 품고 있다. 뽈리 화랑은 수원 최초의 초등학교 소화 초등학교 건물을 화랑으로 개조한 거다. ‘뽈리’라는 이름은 수원 교구에 부임한 프랑스인 신부, 데지레 폴리에서 따 온 것으로 그의 한글 이름은 ‘심응영 데시데라토’, 일명 ‘뽈리 신부’였다. 조선에 부임하여 1953년 이 땅에서 순교하기까지 평생을 한국 천주교를 위해 몸 바친 뽈리 신부는 특히 한글 교육에 힘썼다. 일제 강점기의 서슬 퍼런 세상에서도 1934년 성당 옆에 한글을 가르치는 ‘소화 교습소’를 세웠고 이것이 후에 수원 최초의 초등학교인 ‘소화 초등학교’가 되었다. 현재 소화 초등학교는 광교로 이전했지만 옛 학교 건물은 남아 화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돌로 된 옛 학교 건물은 따스한 분위기를 풍긴다.


KakaoTalk_20251217_142629449_01.jpg 옛 학교 건물을 개조한 '뽈리 화랑'
KakaoTalk_20251217_142629449_02.jpg 화랑 창으로 보이는 성당

굳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수원 행궁에 왔다면 북수동 성당에도 한 번 들러보길 추천한다. 북적거리는 관광지의 소음을 벗어나 옛 시간 속에서 차분히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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