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음식을 하지 않았다

by 크림동동

이번 설에는 아무런 음식도 준비하지 않았다.

결혼 후 처음이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이렇게 해도 되었다. 아들은 밖에서 공부 중이라 명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없고 시댁도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명절 차림이 더욱 간소해졌다. 친정은 멀어서 명절 연휴엔 갈 수도 없을뿐더러 부모님도 동생들과 함께 주로 여행을 다니는 분위기다. 남편 역시 갑상선 수술 이후부터는 부쩍 건강에 신경을 쓰면서 기름진 음식만 보면 잔소리다.

그런데도 작년 추석까지는 나름대로 명절 음식을 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갈비찜을 하고 동태 전이나 오색전을 만들었다. 추석에는 송편을 샀고 설에는 떡국떡을 준비했다. 지난 추석에는 시장에서 갈아 둔 녹두를 사서 처음으로 집에서 녹두전까지 부쳐 봤다. 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남편 탓도 있다. 남편은 매번 준비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집에 기름 냄새가 돌면 좋아하는 눈치였다. 전은 살찐다고 하면서도 금방 부친 전을 쏙쏙 입에 넣으며 즐거워했다. 특별히 알콩달콩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집 사는 식구라, 남편이 잘 먹는 걸 보면 보기 좋아서 자꾸 음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올해는 드디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왜 하필 올해일까? 사실 좀 지쳤다. 12월 한 달 내내 아들이 있다가 1월 5일 갔다. 한 달 남짓 아들이 있는 동안 집밥을 해 먹이겠다고 엄청 종종거리고 다녔다. 일주일에 장을 몇 번씩이나 보고 세끼 내내 음식을 차렸다. 오랜만의 ‘돌밥(돌아서면 밥), 돌밥’을 하려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일주일이 쑥 흘러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달을 지냈더니 아들이 떠나고 나니까 혼이 쏙 빠진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들 있는 동안 덩달아 들떠서 잘 먹던 남편은 아들이 가고 나니까 남은 게 불어난 체중뿐이었다. 그래서 몸무게에 더욱 민감해졌다. 몸무게를 빼야 한다며 그렇지 않아도 많던 잔소리가 유독 심해졌다. 음식을 할 때마다 ‘많이 준다’, ‘안 먹는다’, ‘그걸 어떻게 다 먹느냐’는 소리를 해 댔다. 내 딴에는 남편 건강을 생각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서 식단을 짜고 음식을 했는데 돌아오는 건 잔소리 폭탄뿐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자잘하게 다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음식을 할 의욕이 사라졌다.


게다가 명절 음식은 어차피 칼로리 폭탄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열심히 음식 해 봤자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게 뻔했다. 물가도 살인적인데 괜히 돈 쓰고 나중에 남은 음식 처리하느라 골머리만 앓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남편한테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남편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항상 생각한다. 남편은 예측 능력이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 자신을 모른다.


설 전날, 그러니까 월요일에 남편은 작은 아버지, 시동생과 함께 성묘를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보통 성묘 음식은 대부분 시어머니가 준비하시지만 나도 항상 뭔가 하나 정도는 보태곤 했다. 보통은 빵을 좋아하시던 시아버지를 위해 내가 만든 빵이었지만 평범하게 전을 보내는 적도 많았다. 올해는 음식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려서 지난 주말에 남편과 함께 경동 시장에 갔다. 설 전 마지막 장보기인 셈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내가 동태포나 돼지고기 다짐육을 가리킬 때마다 그냥 두라고 했다. 떡은 좀 사고 싶어 했지만 떡집 앞의 끝 간 데 없이 늘어선 줄을 보고는 도망쳤다. 과일도 딱 우리 먹을 것만 샀다. 시댁 것도 같이 살까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곧 됐다고, 그냥 가자고 했다. 나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그래서 어제저녁, 성묘 전날인데도 우리 집 주방은 조용했다. 기름 냄새를 풍기지도 않았고 싱크대 위도 깨끗했다. 그런데 그제야 남편은 몸이 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괜히 시댁에 전화해서는 뭐 더 필요한 것 없냐고, 전이라도 사갈까 하고 물었다. 나 들으라고 건지 목소리도 컸다. 시동생이 그럴 필요 없다고 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렸다. 남편이 조용히 전화를 끊는데 어쩐지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자기가 한 말은 있으니 이제 와서 나한테 뭐라 할 수는 없고 그래도 허전한 식탁을 보니 명절 기분이 영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게 지난번에 시장에 갔을 때 뭐라도 사게 두지, 저렇게 자기 자신을 모를까?’


속으로 혀를 팠다. 한편으론 조금 고소하기도 했다.


냉장고를 뒤져 보니 그나마 봄동 사 둔 게 있었다. 마침 전분 가루와 부침 가루도 있는 게 기억이 났다. 봄동으로 그럭저럭 배추 전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추 전은 경상도 음식이라지만 아무려먼 어떠랴, 내가 부산 출신이니까 굳이 필요하면 며느리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면 될 일이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온 남편은 내가 봄동 전을 하는 걸 보고 얼굴이 눈에 띄게 펴졌다. 번거롭게 뭐 하려 하느냐고 하면서도 괜히 옆에서 왔다 갔다 굴었다. 내일 성묘 갈 때 싸 가지고 가라고 하니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식용유 좀 갖다 달라, 키친타월 좀 새 걸로 꺼내 갖고 오라는 잔심부름에도 싹싹 움직였다.

그래서 올 설에도 음식을 하긴 했다. 하지만 봄동 전은 명절 음식은 아니니 엄밀히 말해 명절 음식은 하지 않은 셈이다. 그리고 이게 정말 끝이다. 이번 설에 다른 음식은 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더 이상은 남편이 아무리 아쉬운 표정을 지어도 안 된다.


KakaoTalk_20260216_052110133.jpg 봄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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