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다양하고 모순적인 인간의 모습
서머싯 몸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다.
학창 시절 《인간의 굴레》를 읽고 가볍게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머싯 몸의 소설은 고전이지만 다른 고전과 달랐다. 결말이 해피엔딩이었던 것이다. 그 점이 신선했다. 그때까지 읽었던 대부분의 고전들이 거의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비극적으로 끝나던 것과 달리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소설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물론 주인공, 필립의 서사도 흥미진진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결혼을 암시하는 따뜻한 결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알고 보니 서머싯 몸이 가장 후회하고 싫어하는 점이 바로 《인간의 굴레》를 해피 엔딩으로 끝낸 것이라 한다. 그는 《서밍업》에서 고백하기를 《인간의 굴레》를 쓸 때만 해도 결혼이란 제도에 잠시 ‘현혹’되어 그렇게 썼다고 했다. 나는 이미 어느 정도 서머싯 몸의 팬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혹’이라는 단어에서 내비치는 냉소적인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팬으로서 작가에 대해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다. 그가 평생 독신으로 산 것은 알고 있지만 좀 더 따뜻한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작, 《달과 6펜스》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진 《인생의 베일》등을 봐도 그가 결혼이란 제도에 대해 호의를 보인 적은 없다. 그러니 주인공의 결혼을 암시하는 《인간의 굴레》가 예외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서머싯 몸은 결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의 주인공 필립이 그러하듯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잃고 목사인 큰아버지의 손에서 의사로 컸다가 작가가 되었다.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하고 많은 소설과 희곡을 남겼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글 속에 담긴 다양한 경험과 인간 군상, 그리고 대중성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서머싯 몸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글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재미’는 내가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재미’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고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다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평에 ‘대중성’이라는 단어가 포함되는 걸 보면, 그의 글이 주는 ‘재미’가 나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소설에는 소위 말하는 ‘한 방’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항상 의외의 결말을 보여 준다. 독자로서 이런 ‘뒤통수를 치는’ 전개는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다. 마치 추리 소설 같은 현대 장르 소설을 보는 듯한 속도감과 짜릿함이 있다. 나는 그의 소설이 주는 이런 ‘재미’를 즐긴다. 나에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소설을 보고 세상일을 잊고 잠시 다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매력이 없다면 굳이 소설을 읽을 이유가 없다. 그러려면 쉽게 손이 가고 책장이 넘어가야 한다. 지나치게 어려운 이야기는 시작도 전부터 거부감이 든다. 그런 면에서 서머싯 몸은 나에게 안성맞춤이다.
서머싯 몸의 소설이 좋은 이유는 우선 선택권이 많기 때문이다. 장편은 물론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편도 많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서머싯 몸의 단편선만 해도 지금 말하는 《서머싯 몸 단편선 1, 2》 뿐만 아니라 《케이크와 맥주》도 있다. 이외에도 단편들이 더 있다. 다음으로 그의 이야기는 에피소드와 사건 중심이다.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파고 들어가는 철학적인 부류가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한다. 그곳은 영국 시골이기도 했다가 아시아의 오지, 혹은 스페인의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땅이기도 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아우르는 시간대는 제국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다가 쓰러져가는 때이기도 하고 전쟁의 포화가 전 세계를 휩쓴 때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서머싯 몸이 창조해 낸 인물들은 백인 식민지주의자, 선교사, 사교계의 여인, 모험가, 춤꾼이 되기도 한다. 그의 다음 이야기는 어떤 인물들이 어떤 이야기를 펼칠지 가늠할 수가 없다.
이토록 다양한 무대와 인물들은 서머싯 몸의 매력이자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운 관문이기도 하다. 그를 도대체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식민지 역사를 겪은 제3국의 여성 독자로서 그의 작품에 보이는 제국주의적, 여성차별적, 인종차별적 색채가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제국주의자인가? 여성차별주의자인가? 인종차별주의자인가? 내가 그의 작품에 빠져든 것은 학창 시절 서구 문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연장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 내가 가장 중요한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다가 나는 <서머싯 몸 단편선 1, 2>의 해설에서 그의 작품을 읽는 키워드가 인간의 ‘모순’이라는 문장을 읽었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이 되고 그의 작품을 읽는 길이 보이는 듯했다. 사실 작가 자신 역시 작품 속에서 고백하고 있다. 그가 흥미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사실은 ‘인간은 정의하기 어렵다, 이토록 다양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라는 사실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구체적인 작품 소개 하나 없이 추상적이니 이야기만 줄줄 늘어놓은 책 소개는 불친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편이 아니라 단편선, 그것도 《서머싯 몸 단편선》이라면 구구절절 소개보다는 직접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이 작품이 왜 한 마디로 요약해서 소개하기 힘든지 알게 될 것이다. 그토록 ‘다양하고 변덕스럽고 알 수 없는, 서머싯 몸이 그리는 인간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맹세코 나는 나 자신을 거의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웃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각자 외로운 탑에 홀로 갇힌 죄수들이고, 인간의 형상을 한 다른 죄수들과 기준의 신호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 신호의 의미는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서머싯 몸 단편선 2》 (민음사.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