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냄비를 닦았다

어느 순간 집이 엉망이 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면, 마음을 들여다 볼 것

by 마실궁리


반짝반짝 빛나야 할 크리스마스가 조용히 지나간다. 가족과 집에서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을까 하다가 있던 반찬을 꺼내고 찌개를 끓여 소박하게 해결했다.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운 마음에 케이크를 하나 사서 초를 켜고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후 불어 껐다. 산타 할아버지께 레고 선물을 받고 촛불을 불어 끄기 좋아하는 아이만이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고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온전히 자기에게 집중된 하루가 아이에게만은 특별하게 기억되길 바랬던,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하루의 끝에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다가 불현듯 냄비의 찌든 때가 눈에 띄었다. 신혼살림을 장만하면서 평생 쓸 생각에 거금을 들여 샀던 스텐 냄비 군데군데 찌든 때가 껴있었다. 전에도 몇 번 닦을 시도는 했는데 깔끔하게 닦이지 않아 못 본 척 넘기곤 했었다. 안 닦이던 때가 오늘이라고 닦이겠냐만은 마음이 가는 대로 냄비를 닦아보기로 했다.


수조 통에 뜨거운 물을 받아 베이킹소다를 세 스푼 넣고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물을 휘저었다. 수돗물에서 데워 나오는 물보다는 끓인 물이 더 뜨거워 때가 잘 불릴 것 같아 제일 큰 냄비에는 물을 가득 담아 끓였다. 팔팔 끓인 물은 다시 수조 통에 더해 넣고 냄비 4개와 프라이팬 1개를 푹 담갔다. 특히 누렇게 코팅되어버린 찌든 때와 검게 그을린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속 깊이 넣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불렸다가 부푼 마음으로 스펀지로 냄비를 문질러 보았다. 나는 아마도 티브이 광고에서나 봄직한 장면을 기대했었나 보다. 스펀지가 지나간 자리가 쓱 닦이며 빛나는 은색을 드러내는 장면.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고 냄비는 그대로 누랬다.


부드러운 스펀지 대신 거칠한 초록색 수세미를 꺼내 닦아보기로 했다. 수세미를 바꾸자 냄비의 찌든 때들을 조금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냄비의 결대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긁어 닦기 시작하자 누런 땟국물들이 흘러내렸다. 손잡이 사이의 굴곡진 부분과 브랜드가 세겨진 홈이 파진 부분은 더 강한 힘을 줘서 빡빡 문질러야 했다. 분명히 닦이지 않았던 찌든 때였는데 무슨 일인지 잘 닦였다.



하나씩 닦여서 빛을 내는 스텐 냄비를 보니 기분이 상쾌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집을 가꾸니 자신이 가꿔진다는 글귀를 읽었는데 냄비를 닦고 나니 내 마음이 반짝거렸다. 찌든 때가 벗겨진 냄비들은 새 냄비가 되어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고 마음까지 꽉 채워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