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작
날 때부터 정해진 관계가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부모 중에서도 엄마와는 생애 처음 맺어지는 관계의 시작이다. 그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이 있다.
"니 애기 때 엄마 신혼집 삼락동 2층 주택에 살던 거 기억 나나?"
"모르지 난"
"새벽에 청소차 오면 쓰레기 버리러 나가야 하는데, 엄마가 일어나기만 하면 네가 발딱 깨서 어디 가지를 못하게 했었는데~ 그래도 쓰레기는 버려야지 우짜노, 얼른 내려갔다오는데 내가 갔다 올 때까지 니는 빽빽 울고 있었다이가~"
"맞나~
" 또 그건 기억하나? 내가 진짜 니 업고 많이 놀러 댕겼는데~
아빠 장거리 나가고 없어도 혼자 니 포대기 업어서 다대포도 가고 자갈치도 가고 그랬는데~ 찾아보면 사진도 있을걸?"
"그래? 난 기억 안나지~"
"맞다 맞다, 그건 기억나나? 엄마 동래에 보험회사 댕길때, 니는 엄마 손 잡고 걸어가고 동그이는 업어서 같이 회사 가고 그랬다이가~ 버스 타고 메가마트 앞에 내려가지고~"
"어~ 그건 좀 기억난다~ 다리 아픈데 쉬지 않고 걸었던 거 같거든~"
어릴 때 이야기만 하면 나오는 이 기억들은 엄마가 얼마나 생활력 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일을 해야 할 때도 어디든 우리를 데리고 다녔고 힘든 티 없이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는 사람. 몸소 보여주는 행동에 엄마의 책임감과 사랑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다리가 아파 힘든데도 꾹 참고 걸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친구 같은 엄마이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쯤이었다. 거실에서 엄마와 단 둘이 티브이 리모컨을 돌리며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볼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속이 출출해서였을 거다. 엄마는 속을 채워줄 간식을 냄비에 찌기 시작했고 추운 겨울에 갓 삶은 고구마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냄비 뚜껑의 작은 구멍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고 엄마는 뚜껑을 열어 젓가락으로 푹 찔러 고구마가 익었나 확인했다.
"잘 익었네~ 가져가서 먹어라~"
"그냥 하나만 던져주면 안 되나~?"
"한 개? 잘 받아래이~"
"아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그 사이 번쩍하는 별을 본 것도 같다. 엄마가 던진 야구공 크기의 묵직한 고구마는 내 오른쪽 눈에 정통으로 맞았고 짧은 신음과 함께 주변은 조용해졌다. 아픈 눈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엄마랑 눈이 마주친 순간 웃음이 터졌다. 그 상황에서 딸의 눈을 확인한다거나 맞은 눈이 아파 울음을 터뜨리는 우리가 아니었다. 조준을 하고 던진 것도 아닌데 정확하게 눈에 맞아버린 상황이 황당하고 웃겼다.
이 관계로부터 시작된 나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엄마를 닮은 생활력 강하고 장난기 많은 엄마가 되었다. 아직도 본받고 싶은 부분이 많은 나의 엄마가 내 관계의 시작임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정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도 꼭 엄마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