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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n 19. 2019

뜨거운 안녕

읽고 쓰는 여자


놓아주지 못했던 그를 이제야 보낸다. 뜨겁게 사랑했던 우리는 이제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지난 7년 간 제 몸을 뜨겁게 불태우던 그는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지 아니면 기력이 쇠한 건지 내 물음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1초 안에 대답하던 그의 반응 속도는 2분을 넘어갔다. 이젠 그와 함께 있으면 속이 답답하다. 나 역시 그의 굼뜬 반응에 지루함을 느끼며 만남을 피했다.


안녕, 정말 고마웠어.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난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흙빛으로 변하기도 하고 어떨 땐 새파랗게 질리기도 했다. 혹시 내가 질린 걸까? 팔도 등도 두드려보고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지만 그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바라보다가 난 이제야 그를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뜨거운 안녕. 2011년 차가운 겨울에 우린 처음 만났다. 그를 만난 곳은 동네 마트. 내가 먼저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스마트한 머리에 훤칠한 키 그리고 빛나는 은빛 정장을 입은 그를 처음 본 순간 한눈에 반했다. 하지만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다른 사람에 비해 덩치가 좀 큰 편이었다.


그렇게 첫눈에 반해 데려온 노트북과 동거 동락한 지 9년. 인천과 서울을 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통학하며 적적한 마음을 달래주던 내 베프. 내 손에 땀이 많은 탓에 매일 살갗(키패드)이 벗겨지는 아픔이 있어도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주었다.


2.7킬로의 그를 메고 다닌 덕에 어깨가 넓어졌다.


그와 나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동기들은 하나 같이 그를 업고 다니다간 키가 줄어들지 모르겠다는 걱정 어린 말을 던졌다. 하지만 대학생활 내내 글 쓰고 인터뷰하는 에디터로 활동한 탓에 그는 내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깜빡하고 넘겨버릴 만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기록해주었다. 내 시시콜콜한 감정과 일상을 제일 잘 아는 게 바로 그 일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뜨거웠다. 처음엔 나의 일방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실상은 그게 아녔다. 오랫동안 관심을 쓰지 않으면 떼쓰는 아이처럼 자꾸 렉 걸려 멈춰버렸다. 나는 그가 변하지 않길 바랬다. '제발 변하지 마.' 변하지 말라는 말은 폭력적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의 속도를 맞춰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처음 그때처럼 속도를 나와 똑같이 맞춰 달라는 말이었다. 점점 성능이 좋아지는 노트북 사이에서 너도 천천히 가지 말라는 나의 강요적인 사랑.


그래. 천하에도 없는 나쁜 연인이 바로 나다. 무겁다는 그의 단점이 부각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녔다. 글 쓰며 세상을 유랑하고 싶었던 여자는 그를 이제 집안에만 두기로 결심했다. 작고 앙증맞은 하얀색 또 다른 그인 넷북에게 내 애정을 쏟아부었고 집에 있는 그를 점점 잊어갔다.


언제 이렇게 너의 구석구석을 보겠어. 고마웠다.


이렇게 나쁜 사랑은 혼자 이별을 준비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한 달 전이 내가 정해둔 그와 나의 이별 디데이였다. 사실 내 마음은 8개월 전부터 희미해지고 있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 햇살을 본지도 한 해가 지난 게 뚜렷한 증거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고, 반응이 느린 그를 붙잡고 혼자 떠들어대기엔 너무 지쳐버린 거다.


내 분신과도 같은 그를 놓아주기엔 준비 과정이 필요했던 걸까. 그를 분해했지만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깨끗이 그를 잊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후회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 한번 쓰다듬어주고 손 한 번이라도 더 잡아줄걸.


그래도 열렬히 사랑했어.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글 쓰는 나도 없었을 거야. 정말 고마웠어. 9년 동안 내 외로운 시간들을 함께해 준 너로 인해 난 성장할 수 있었어. 안녕, 내 첫 노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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